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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t therapist Sep 23. 2021

나는 불안한 내가 좋다

불안이랑 함께 살기

불안장애가 낯설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다. 그래서 모두들 불안을 떨치려 노력한다. 그러나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불안을 가지고 살아간다. 지금 돌아보면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부터 나는 불안한 아이였다. 그 불안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때로는 침묵하고 때로는 숨었고 때로는 도망가고 때로는 울기만 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장소에 가는 것은 나에게 정말 괴로운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매 학년 학년이 바뀌는 것이 너무 싫었다. 이제 좀 익숙해지고 친해진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도 싫고 새 선생님과 새 친구들과 만나는 것은 늘 겁나고 무서웠다. 그래서 늘 몇 달 동안 침묵하고 그 후에 좀 친해질 만하면 헤어지길 반복하는 학교 생활이 전혀 즐겁지 않았다. 


친구들이 너무 재미있어하는 정글짐도  그네를 마치 하늘까지 닿을 듯이 타는 것도 나에겐 두려운 일였다. 학교에서 발표를 하거나 나서서 무언가를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수업시간에 먼저 손을 든 적도 없고, 아이들과 주동해서 장난을 치거나 놀이를 주도한 적도 없다. 나는 늘 반에서 가장 조용하고 가장 존재감 없는 아이였다. 그러니 아이들이 장난을 쳐도 아이들이 놀려도 울기만 할 뿐 말도 못 하던 나는, 아이들이 괴롭히기 좋은 존재이기도 했다. 이렇게 소심하고 겁 많은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못하는 무능력한 아이인 것만 같아 나 자신이 싫은 적도 많았다. 나 말고 다른 아이들은 모두 발표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고 공부도 잘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성격을 바꿔보려고 활달하고 재미있는 친구들과도 어울려 보기도 했지만 나는 그들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은 알고 있다. 불안은 장애가 아니라 인간의 본능이라는 것을. 인간에게 불안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어 살려고 하는 것이다.  불안이 낮은 사람이야 말로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 같아서 자신과 주변인들에게 오히려 더 큰 문제를 안겨주는 경우가 많다. 


불안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무엇이든 신중하게 고민하고 신중하게 선택했다. 그리고 선택한 일에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스스로 남들보다 부족하다 느꼈기 때문에.  불안 때문에 살면서 충동적인 행동을 하거나 위험한 짓을 한 적이 없다. 그래서 골치 아픈 사건이나 문제에 연루될 일도 없었고 크게 다치거나 한 적도 없다. 새로운 환경에 불안이 높은 나는 자연스럽게 관찰능력과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도 높아졌다. 그 덕분에 인간관계에서도 상대가 누구이든 선을 넘거나 예의 없는 행동은 하지 않는다. 이런 태도는 사람들의 신뢰를 쌓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사회성이니 리더십 등, 살면서 필요한 기술은 얼마든지 익힐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는 것, 사람들 앞에서 나의 의견을 표현하는 기술 등은 훈련을 통해서 얼마든지 발달시킬 수 있는 것들이다.  경험과 훈련을 통해서 나 같은 아이도 늘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직업인 상담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능력을 펼치는 사람들 중엔 의외로 불안이 높고 내성적인 사람들이 많다. 다만 그들은 자신의 직업적 이유로 필요한 기술을 익히고 사는 것이다. 학창 시절 한 번도 스스로 손을 들어 발표한 적이 없는 나는, 지금은 필요하다면 수십 명의 사람들 앞에서 한국어든 영어로든 나의 의견을 말할고 리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물론 여전히 스카이 다이빙을 하거나, 산 위의 흔들 다리를 건너거나, 배낭 하나만 매고 세계여행을 가고, 서핑을 배우는 것 같은 것은 나에겐 아직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언제나 나의 두 다리가 땅에 든든히 서있을 때 가장 안전하다 느낀다. 모든 사람들이 이런 익스트림 스포츠나 도전을 해야 할 이유도 좋아해야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대신 나는 책 속에서 새로운 경험과 지혜를 얹는 것을 좋아하고, 그림을 그리며 나의 상상력을 펼치는 것을 즐기며, 가까운 사람들과 깊은 교제를 하고 글을 쓰며 사람들을 위로하고 소통하는 것에 기쁨을 느낀다. 우리 모두가 똑같은 일을 좋아하며 살 필요는 없으니까.


내가 불안이 높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래서 내가 남들처럼 잘하지 못하는 것들로 괴로워하는 대신 내가 좋아하는 일에 집중했다. 그리고 내 마음과 몸의 반응에 집중하면서 나를 돌보았다. 장이 꼬이는 듯이 아프거나, 뒷목이 뻣뻣해져서 머리가 아프고, 악몽을 꾸는 날이면 스스로 긴장하고 스트레스받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를 쉬게 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잠을 푹 자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는 등으로 나에게 진짜 휴식과 기쁨이 되는 활동을 하면서 나를 돌보았다. 


그리고 내가 긴장이 될만한 상황이나 예기치 못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최대한 준비했다. 미국에서 학교를 다닐 땐 매 첫 수업은 항상 굶고 학교를 갔다. 늘 긴장으로 배가 꼬였기 때문이다.  처음 가는 길이나 처음 가는 장소는 늘 여유 있게 출발해서 길을 잃어도 당황하지 않도록 준비했다. 대학원 수업에 영어로 발표를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믿을 만한 친구 앞에서 미리 연습했다. 때론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며 그렇게 내 불안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도전하고 성취했다. 때론 어쩔 수 없는 상황에 걱정이 되기도 하고 암울한 미래에 불안이 엄습할 때도 있지만, 그럴 때마다 현재에 집중하고 감사를 훈련함으로 걱정을 떨쳐내고 있다. 


불안은 장애가 아니다. 내 안에 있는 불안을 무조건 부정하려 하거나 회피하려는 것은 답이 아니다. 물론 불안이 내 마음과 몸을 완전히 지배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렇게 불안에 지배당하면 사실 그 어떤 병보다 고치기 힘든 병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불안은 어쩌면 나를 지켜주는 센서장치와 비슷하다. 그리고 그 센서장치는 언제나 나를 너무 과부하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내가 그 불안을 감지하고 잘 관리할 수만 있다면 누구든지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다. 현재의 내 모습은 어쩌면 불안이 만들어 준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지금 충분히 만족하며 살고 있다. 불안과 함께 살아가는 지금의 내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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