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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t therapist Sep 25. 2021

나의 오빠

사랑하고 미워했다

나에겐 오빠가 있다.  두 살 많은 오빠는 저에게 참 밉고도 고마운 존재이다. 어린 시절 느끼기 힘든 복잡 미묘한 감정을 오빠로부터 정말 많이 느끼고 살았다.  한 많은 할머니의 삶과 불행한 엄마의 결혼생활의 유일한 기쁨이었던 오빠는 나에겐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넘사벽 같은 존재였다. 남아선호 사상이 심했던 집안에 오빠 밑의 여자아이는 가족들에게 주목받기 힘들었다. 거기다 오빠는 재수 없게 똑똑하기까지 했다. 정말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배우는 오빠 덕분에 나는  집에서 바보 취급을 받기 일수였다.

그래도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던 어린 시절엔 오빠가 마냥 좋았다. 다른 이웃의 별난 오빠들처럼 여동생을 괴롭히고 장난치는 오빠가 아니라, 날 데리고 다니며 자전거도 태워주고 종이 인형도 잘라주던 다정한 오빠였가기 때문이다. 아마 내가 할머니에게 너무 구박을 받아서 불쌍해서 그런 건 아닌가 싶다. 그러나 내가 점점 커가면서 오빠의 잘남과 존재 자체가 나에게 너무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오빠와의 재능 비교와 더불어 할머니의 말도 안 되는 편애는 내안에 분노를 쌓이게 했고 그 편애를 중재시켜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집에서, 의 분노는 당사자인 오빠에게로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오빠에게 괜히 신경질을 부리며 화를 내고 날을 세웠다. 오빠만 없어도 내 삶이 좀 편해질 수 있을 것 같아서 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도 오빠 덕분에 집에서 숨을 쉬고 살았던 것 같다. 똑똑하기도 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글을 잘 쓰던 오빠는, 감수성이 아주 풍부한 언니 같은 오빠였다. 오빠랑 고래고래 소리를 치며 싸우기도 했지만, 여자 마음을 잘 아는 오빠는 대화도 잘 통했고 사이좋게 놀 땐 그 누구보다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오빠와 사촌동생들과 함께 비디오를 보고 게임을 하고 놀이동산을 다니며 그 답답한 시절을 견디었던 것 같다. 아마 할머니만 아녔어도 정말 사이좋은 오누이가 되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어린 시절엔 할머니와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혼자 잘난 오빠가 질투가 나고 미웠다. 그러나 부부싸움과 고부갈등이 끊이지 않았던 우리 집에서 외아들로 살았던 오빠의 삶도 나만큼 힘들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이제 어른이 되고 보니 알 것 같다. 할머니의 많은 손자 중에 유독 제일 소중한 손자였고 사랑 없는 결혼생활을 하는 엄마에겐 남편 같은 아들이었지만, 엄마와 할머니의 고부갈등의 중심이었고 말도 안 되는 아버지의 기대에 자신의 꿈은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와 나는 글을 쓰는 것이 재미있고 가끔 글을 잘 쓴다는 칭찬을 듣기도 하지만, 나는 스스로 글을 잘 쓴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오빠 때문이다. 오빠는 초등학교부터 작문만 했다 하면 상을 받아오고, 중고등학교에선 국어나 작문 논술로는 5% 안에 드는 능력자였다. 그래서 그는 일치감치 국어국문학과를 진학해서 소설가나 시나리오 작가 되고 싶어 했지만, “남자가 국문학과 나와봐야 국어선생밖에 더 되냐?” 는 아버지의 말에 일언지하 묵살당하고 만다. 그리고 아버지는 경영학과나 경제학과 등 돈 되는 직업이 될만한 곳으로 아들을 밀어붙이셨다. 재수 끝에 부산대학교에 원치 않은 정치외교학과에 들어간 오빠는 방황을 참 많이 했다. 학교 다니면서 몰래몰래 글을 쓰고 학교 신문에 연재도 하고 글 쓰는 카페 등에 글을 올리며 나름 활동을 했다.


그러나 그렇게 글을 쓴 성과는 돈밖에 모르는 아버지의 신임을 얻을 수 없었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지지받지 못한 오빠의 꿈은 늘 부모에게 변명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점점 학과 공부는 등한시했고 그렇게 그는 가족들과 틀어지기만 했다. 방황과 갈등 끝에 기어이 자신이 하고 싶은 소설도 쓰고 영화 시나리오도 쓰는 일을 시작했지만, 창작예술이라는 것이 금방 빛을 보진 못했다. 아버지에겐 여전히 “한심하고 밥벌이도 못하는” 아들로 남을 수 없었던 오빠는 아마 나 만큼 힘들고 아팠으리라.

아버지에겐 능력 없고 한심한 아들이었지만 어머니에겐 남편 같았던 오빠는 정서적으로도 독립이 될 수 없었다. 번번이 데려오는 그의 여자 친구들은 다 성에 안 찬다며 퇴짜 맞기가 일쑤였으니, 또 다른 고부 갈등의 서막을 보는 듯했다. 그러다가 끝내 마지막엔 부모의 원치 않은 결혼까지 감행한 오빠는 결국 집안의 불란의 중심이 되었다.

그 당시 이미 미국에서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던 나는 기분이 참 미묘했다. 어머니도 오빠도 참 안됐다는 마음이 들면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없으면 큰일 나는 존재같이 묶여있던 그들은 정말 처절하게 아프게 떨어져 나갔고 그 상처를 회복하는 데는 몇 년이 걸렸다. 절대로 어머니와 오빠 사이에 낄 수 없을 것 같았던 나는, 그 이후로 오히려 어머니의 유일한 위로가 되어준 딸이 되어 살짝 통쾌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어린 시절 집안의 반짝반짝 빛나던 별은 빛을 잃어갔고, 한쪽 귀퉁이에 처밖혀 있던 쓸모없던 돌덩이가 알고 보니 그냥 돌덩이가 아니었던 순간이었으니까. 아마도 평생을 두고 오빠를 이겨보고 싶었던 내 욕망이 드디어 이루어진 순간 나름 기분이 짜릿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이 좀 더 지나서 미국에 와서 나는 남편 덕분에  하고 싶은 공부 다 해보는 한을 풀고 부모님께 받지 못한 사랑도 넘치게 받았다. 미술공부를 하고 상담을 공부를 다하고 나서도 딱히 돈벌이를 잘하거나 대단한 사람은 되지 못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하고 싶었던 걸 다 해본 것만으로도 인생의 한을 푼 것 같았다. 그러나 오빠는 그러지 못했다. 가정이 있고 아이가 둘이 있는 가장이 글만 쓰고 밥을 벌어먹고 산다는 것은 정말 큰 행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오빠도 새언니도 밥줄 걱정에 오랫동안 힘든 세월을 보냈다. 가족의 생계 때문에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해보기도 하고  험한 일에 몸과 마음이 상한 날들을 많이 보냈다. 그런 오빠를 보면서 이젠 참 안쓰러운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글 쓰는 것도 포기하지 못하고 생계도 포기하지 못하는 그의 삶이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지 상상이 되었다. 그래도 나는 돈이 되지 않더라도  오빠가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그에게 숨 쉬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다. 우리가 숨을 쉬는 것은 살기 위함이지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니까.

어떻게든 그렇게 이겨먹고 싶었던 오빠가 중년을 넘어서 이제야 짠한 마음이 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하늘이 그에게 기회가 한번 와주기를 바라면서. 그런 그가 얼마 전 이메일로 드라마 시나리오를 계약했다며 연락이 왔다. 새벽에 받은 메일에 너무 기뻐 잠이 다 달아나버렸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어쩌면 이제 오빠가 한을 풀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해도 지금 이 시국에 드라마 제작 환경이라는 것이 하다 보면 엎어지고 파기될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의 인생에 그가 정말 원하던 것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너무 기뻤다. 유명해지지 않아도 돈을 많이 못 벌어도, 사람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빛이 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가 다시 한번  반짝반짝 빛나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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