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초롱 May 17. 2021

남편의 자기소개서

주말은 즐거워

 직장인 대부분이 그렇듯 남편도 나도 평일 내내 주말만 기다린다. 다만 우리의 주말 풍경은 좀 (많이) 다른데 우선 나는 바쁘다. 할 일-밀린 일기 쓰기, 가계부 정리, 책 읽기, 공부, 게임 등등-이 많아서 목록을 적어놓고 하나씩 지운다. 아침 7시부터 작은 집을 사부작사부작 돌아다니다 보면 남편이 일어날 때쯤에는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반면 남편에게 집은 아무것도 안 하는 곳, 주말은 아무것도 안 하는 날이다. 밥 먹고 게임할 때 빼고는 거의 누워서 뒹굴거린다. (왕 게으름뱅이로 오해하실까 봐 덧붙이자면 학교 다닐 때 여러 번 전교 1등을 했다고 합니다.) 결혼 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볼 때마다 신기하다. 이렇게 달라도 서로 나처럼 하라고 강요하지 않기 때문에 딱히 싸울 일은 없다.     


 지난 주말, 간만에 일정이 없어서 집에만 있기로 했다. 마침 날이 궂어서 집에 있기도 딱 좋았다. 부지런히 할 일 목록을 지우고 있는데 남편이 옆에 와서 앉았다. 우리 집 거실 창 쪽에는 남편과 내 책상이 나란히 있고 남편 자리는 보통 게임할 때 빼면 비어 있다.

 "게임하려고?"

 "아니, 일해야 해."

 새로 들어가는 회사 프로젝트에 지원해보라는 권유를 받았다고 한다. 별생각 없었던 남편은 경력에 도움이 될 거라는 선배 말에 한 번 내보기나 해야겠다며 지원 서류를 열었다. 그런가 보다 하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은 울상이 됐다.

 "왜?"

 "나... 자기소개서 한 번도 안 써봤단 말이야."

 "아직 인생의 쓴맛을 못 봤고만."

 이 손바닥만 한 거에 내 소개를 어떻게 하냐는 둥, 이거 쓴다고 보긴 보는 거냐는 둥 남편은 한참을 투덜거렸다.

 "아니, 일단 시작을 못 하겠어. 뭐라고 써? 안녕하세요, 저는 동글입니다. 해도 돼?"

 "누가 자기소개서에 인사를 해."

 "그럼 뭐라고 해? 첫 줄만 써줘."

 "자소서 국룰 몰라? 엄격하신 아버지와 자상하신 어머니 사이에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한참을 낄낄거리다가 다시 진지 모드. 물론 얼마 가지 않았다. 왕년에 자소서 좀 써본 나는 이런저런 훈수를 뒀다.

 "이거 볼 사람한테 네가 뭘 잘하고 뭘 좋아하는지 알려준다고 생각하고 써봐."

 "나 카드 라이더 잘하는데. 벌써 마스터거든. 이번에 시즌 패스도 샀잖아. 그 얘기 쓸까?"

 "...."

 "말 나온 김에 한 판 해야겠어."

 잠시 게임 모드. 다시 자리로 돌아온 남편에게 제안했다.

 "내가 써줄까?"

 "응응. 여보가 나를 소개해주는 거야."

 "그냥은 안 되지. 그래도 내가 현직 방송작가인데. 항목 당 3만 원 어때?"

 "야, 그래도 내가 남편인데 10% 깎아줘라. 2만7천 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

 "근데 별로면 어떡해? 일단 하나 써봐. 보고 더 맡길지 정하게."

 "이 짜식이?"

 결국 대필 제안은 무산됐고 남편은 창작의 고통을 견딘 끝에 간신히 완성했다. 남편 인생의 첫 자기소개서를 보면서 철딱서니 없는 아내는 '우리 남편 이렇게 귀여운데 뽑아주세용' 생각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남편과 강아지의 공통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