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올여름도 휴가 없이 지나갔다. 시국도 시국이거니와 재택근무를 하다 보니 어영부영 시기를 놓쳐버렸다. 작년에도 미루고 미루다가 11월 말에 아파서 한 주 쉬었는데 올해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프리랜서는 휴가 챙겨 먹는 것도 일이다.
사실 여름 휴가가 그렇게 간절하지는 않았다. 더울 때는 움직일 엄두도 안 나고 사람 많은 곳도 원래 싫어한다. 어디 여행 가면 빨리 집에 가고 싶다(?). 어린이 집순이는 무럭무럭 자라 청년 집순이가 되었고 언젠가 할머니 집순이가 되겠지. 재택근무가 좀 힘든 건 집이 일할 환경이 아니라서 그런 거지 집이 싫은 건 아니다. 그런데 요즘, 자꾸만 밖에 나가고 싶다.
날이 궂어 아침에 달리기하러 나가지도 못하고 종일 집에만 있는 날이 계속됐다. 내리는 비를 보고 있자니 내가 꼭 웅덩이에 고인 물 같았다. 어느 저녁 우산을 쓰고 야식거리를 사러 밖으로 나왔는데 선선한 공기에 가슴이 두근거려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여보? 나 밖에 나왔어. 짱이야. 너무 좋아!"
"그랬어, 집순이?"
나가고 싶다, 나가 놀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다가 지난 주말 드디어 남편과 집을 나섰다. 마트에 장 보러 가는 거 말고 외출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출발하기 전에 스타벅스에 들러 음료를 한 잔씩 샀다. 이것만으로도 너무 신이 나버렸다.
"사진 찍어야지, 사진. 자, 건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집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차를 몰았다. 주차하고 강가를 걷는데 날씨가 참 좋았다. 츄리닝 말고 번듯한 옷 입은 건 오랜만이라 또 사진을 찍었다. 예전에는 일상이었던 일들이 새롭게 느껴져서 새로웠다.
"나 사실은... 집순이가 아닌 게 아닐까?"
"아무리 집에 있는 거 좋아해도 한 번씩 밖에 나와야 해."
“나오니까 너무 좋아. 왕 좋아."
뭐 그렇게 대단히 나이를 많이 먹은 것도 아니지만 20대보다는 30대가 되고 좋아진 것들이 많다. 가을이 시작되는 바람도 좋고 이런 소소한 외출도 좋고 좋아하는 것들이 많아진 내가 또 좋다. 40대에는 어떤 것들이 좋아질까.
독립서점을 찾아서 한참 걷고 시장에서 떡도 사고 빵집에서 파이도 샀다. 사람 많은 곳은 피하느라 차에서 한 입씩 먹어봤는데 으음~ 맛있었다. 예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식당 앞에서 고민하다가 저녁은 집에 와서 먹었다. 그래도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