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수 있다면
해가 바뀌면 여기서 일한 지 햇수로 5년이 된다. 1년에 한 번씩 꼬박꼬박 회사를 옮겨 다니던 내가 어쩌다 이렇게 눌러앉은 건지 스스로 놀랍고 같은 업계(?)에서 일하는 친구들도 종종 묻는다.
"아직도 거기서 일해?"
"어떻게 한 군데 그렇게 오래 있어?"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서울 밖 머어어언 곳에서 출근하기에 지금 팀이 알맞아서, 두 번째는 좋은 동료를 만난 덕분. 그리고 세 번째는 더 이상 가고 싶은 곳이 없기 때문이다.
원래는 라디오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대학교 4학년 때 방송작가 교육을 받으러 갔다가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시사·교양 프로그램 작가님의 멋짐에 홀랑 넘어가 진로를 바꿨다. ('라디오 작가는 죽어야 자리가 난다'는 전설을 듣기도 했다.) 막내작가로 일을 시작하고 궁금한 게 많아서 이 방송국, 저 방송국 잘도 옮겨 다녔다. 소위 '이름만 말하면 다 아는' 프로그램도 해봤고 '저긴 꼭 가고 싶다'고 생각했던 팀에도 두어 번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가고 싶은 곳도, 궁금한 곳도 없다.
얼마나 진심이냐면 지금 회사로 옮기면서 가족과 친구들에게 여러 번 한 얘기가 있다.
“난 여기가 마지막이야. 작가 더 안 해.”
아예 이직을 하려고 최근에 자격증도 땄다. 작가를 때려치울 준비는 끝났다. 그런데 마음이 좀 흔들리는 일이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김민철 작가님의 <내 일로 건너가는 법>에는 작가님이 어린 연차였을 때 만난 팀장님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작가님에게 그분은 '멀리 점을 찍어주는 사람. 팀원이 생각지도 못한 곳에 점을 찍고, 여기까지 가보자, 라고 말하는 사람' 이라고 한다. 그리고 조금 벅찬 과제를 내주시며 이런 말을 덧붙이셨다고 한다.
"내가 있으니까, 너무 불안해하지 말고 한번 해봐."
이 짧은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오랫동안 마음이 먹먹했다.
작가를 그만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닮고 싶은 사람이 없어서였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동안 만난 이상한 사람들처럼 될까 봐 겁이 났다. 본인이 출근하는 시간에 자리를 비웠다고 사람들 다 있는 데서 악쓰던 사람, 나가라고 해서 알았다고 했더니 자기가 잘린 것처럼 대성통곡하던 사람, 되지도 않는 고집을 부리길래 편들어주지 않았더니 "너는 애가 참 기생 같다"고 했던 사람. 다들 지금도 어디서 누구를 괴롭히고 있진 않길 바랍니다. 진심으로요.
지겨웠다. 할 만큼 했고 딱히 미련도 없었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니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돼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송 일이 힘들고 어려운 후배에게 멀리 점을 찍어주고 내가 있으니까 한번 해보라고 힘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보람 있을까. 그 후배가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면 그건 또 얼마나 기쁠까.
물론 실력과 인성을 먼저 갖추는 게 순서이겠지만, 아주 잠시 멋진 언니가 되는 상상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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