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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롱 Apr 20. 2023

사고뭉치와 산다는 건

쉽지 않지만


 회사를 나와서 한 달 동안 하는 일도 없이 바빴다. 얼마나 바빴냐면 미용실 갈 시간이 없어서 뽀글뽀글한 곱슬머리를 한 무더기(...) 이고 다녔다. 미용실 사장님이 인정한 우리 동네 곱슬머리 3대 천왕인 나는 버티고 버틴 끝에 지난 주말에야 머리를 하러 갔다. 


 KTX 타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왔다 갈 수 있는 시간을 미용실에서 보내고 만신창이가 되어서 나왔다. 남편이 데리러 온다고 하길래 본가에서 늦은 점심을 먹으며 기다렸다. 엄마가 급하게 만들어 준 계란 김 볶음밥을 한 그릇 해치웠을 때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큰일 났어!"

 2년 전 에어백이 터지고 조수석이 다 부서지는 큰 사고가 났을 때도 누구보다 침착했던 남편이었다. 너무 침착해서 큰일은 아닌 줄 알고 현장에 가보니 안 다친 게 이상할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큰일이란 대체 뭘까. 심장이 철렁했다.

 "무슨 일이야?!"

 "음... 우리 집 문이 안 열려!"

 "뭐?"


 남편의 설명은 이랬다. 집에서 나와 현관문을 닫는데 뭔가 득득득 긁히는 소리가 났고 이상해서 문을 다시 열어보니 안전 고리가 잠겨 있었다는 것. 문이 닫힐 때 고리가 튕기면서 걸려버린 게 아닌가 싶었다. 우리 집에는 나와 남편과 귀여운 인형들 약 300명 그리고 다육이 4명이 살고 있다. 안전 고리를 열 수 있는 인간1과 인간2는 모두 집 밖에 있었다.

 "그게 왜 잠ㄱ... 너는 진짜... 하..."

 생각도 못 했지만 생각보다 큰일은 아닌 것 같아서 다행이면서도 한숨이 나왔다. 걱정스럽게 지켜보는 엄마 때문에 큰 소리를 낼 수도 없었다. 안전 고리를 끊는 것 말고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사하고 1년이 훌쩍 지났지만 아까워서 못도 하나 안 박았는데... 멀쩡한 안전 고리를 끊어야 한다니 속이 쓰렸다. 그러자 남편이 제안을 했다.

 "화재 대피로로 윗집에서 내려올 수 있으니까 윗집에 부탁해 볼까?"

 "... 알았어, 일단 끊어 봐."

 문자 메시지를 뒤적여서 관리사무소 전화번호를 찾았다. 토요일 오후라 연결이 안 될 것 같았지만 전화를 걸었고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관리소입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OOOO호 사는 사람인데요. 저희 집 안전 고리가 잠겼는데... 안에 사람은 없고요. 혹시 이럴 때 방법이 있을까요? 윗집에서 화재 대피로로 내려가도 될까요?"

 "아... 방법이 있습니다. 제가 한번 해볼게요. 집에 오시면 연락하세요!"

 안전 고리를 자르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금세 마음이 누그러졌다. 한껏 처진 눈썹으로 데리러 온 남편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관리사무소에 전화했어. 아저씨가 해결해 준대."

 "오 진짜? 다행이다!"

 청소하다가 멀쩡한 협탁 다리를 부러뜨리고 육회 먹고 응급실에 가고 차 문을 안 잠갔다가 좀도둑한테 털리고... 그동안 남편이 일으킨 크고 작은 사고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응... 사고뭉치랑 사는 게 쉽지 않네."

 "사고뭉치? 귀엽당~"

 "...??? 사고뭉치 덕분에 브런치 아이템이 마를 날이 없어."

 "다음엔 또 무슨 사고 쳐줄까?"

 눈치 챙기자, 사고뭉치여.


 "저도 해본 적은 없는데 유튜브에 나오더라고요."

 노끈 하나를 들고 나타나신 우리의 구세주님은 5분도 안 돼서 해결하고 쿨하게 퇴장하셨다. 사고뭉치와 살다 보니 심심할 겨를이 없다. 이제 좀 심심해지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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