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권의 부작용
쓸데없는 거 사는 데 아낌이 없는 내가 37년 동안 한 번도 안 사본 게 바로 복권이다. 복권만큼 쓸데없는 게 있냐고 생각했는데 내가 안 산 걸 보니 사실 세상에서 제일 쓸 데 있는 것 아닐까. 이상주의를 추구하는 나에게 복권은 너무나 현실적이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복권 살 돈으로 차라리 귀여운 스티커를 사서 다이어리에 붙이는 게 더 생산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기분이 조크든요.
방송작가로 일하면서 기 세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생긴 건 제 밥그릇도 못 챙길 것 같은데 가만 보면 기가 참 세다고, 어디 가서 굶어 죽지는 않겠다고. 동의한다. 기가 세다고 생각하는 근거는 유전이다. 엄마는 촉이 좋아서 뽑기를 하면 꼭 갖고 싶은 걸 집는다. 꿈도 잘 맞는 편이다. 제가 바로 엄마의 하나밖에 없는 딸이랍니다.
며칠 전 꿈을 꿨다. 눈을 번쩍 뜨고도 한참 동안 생생했다.
"나 복권 사야 할 것 같아."
"그래. 퇴근하고 갈래?"
종종 복권을 산다는 남편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러라고 했다. 그날 퇴근을 하고 정말 회사로 데리러 왔다.
"내가 복권 가게 찾아봤는데 좀 가야 있더라고."
"아니지, 기왕 살 거 명당으로 가야지."
남편은 얼마 전에도 1등이 나왔다는 꽤 먼 거리의 복권 판매점으로 차를 몰았다.
"현금 있어?"
"아니, 없지. 왜? 카드 안 돼?"
내가 꿈을 꿨으니 내 돈으로 사야 할 것 같은데 늘 그렇듯 현금이 없었다. 남편에게 그 자리에서 계좌이체하고 만 원을 받았다. 만 원이면 막걸리가 몇 병인데...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쳐지나갔다.
연휴를 앞둔 목요일 저녁, 복권 판매점으로 계속 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다들 복권에 진심이었구나.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종이 위에 조그만 숫자들을 노려보며 일곱 개를 칠했다.
"일곱 개가 아니라 여섯 개래!"
기껏 칠한 종이를 버리고 다시 여섯 개를 골랐다. 혹시 모르니까 자동도 5천 원어치를 샀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길, 나는 아무도 시키지 않은 마음의 준비를 시작했다.
"당첨 되면 난 계약직이니까 회사 그만둘래. 여보는 계속 다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그런 게 어딨어?"
"둘 다 집에 있으면 좀 그래. 넌 취미 삼아 다녀."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 또 뭐하고 싶어?"
"음... 여행도 가고 차도 사고 싶어. 대출을 먼저 갚아야겠지?"
복권을 사러 갈 때는 참 멀었던 길이 당첨 이후를 계획(?)하며 돌아오니 금방이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1등 당첨되면 돈을 어디서 찾는지까지 찾아보고 잠들었다. 이 정도면 중병인 거죠.
인생 첫 복권의 부작용은 급기야 영원한 사랑 고백으로 이어지는데...
"우리 당첨돼도 절대 돈 때문에 싸우지 말자. 계속 지금처럼 사이좋게 지내는 거야. 나는 여보를 영원히 사랑해."
"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큰일 났네, 진짜ㅋㅋㅋㅋㅋㅋㅋㅋ"
방에 누워서 뒹굴거리던 남편은 한참을 깔깔 웃었다. 왜 웃냐고! 나 진지한데!
이틀 자고 나니 약간 정신이 돌아왔다. 오늘 밤 결과와 상관없이 아무래도 내 인생에 내돈내산 복권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