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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롱 Jun 02. 2023

부장님은 알고 보면

아무 일 없을 거야

 

 퇴근하고 집에 가서 남편을 만나면 아무것도 하기 싫다. 남편이 야근하는 날에는 책도 읽고 운동도 가는데 같이 있으면 드러누워서 게임하고 떠들기만 한다. 저녁 시간은 왜 이렇게 빨리 가는 걸까. 며칠 전에도 게임 몇 판 했을 뿐인데 10시가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이제 씻어야 하는데, 씻고 자야 하는데 10분만, 5분만 하면서 계속 미루고 있었다.

 "내가 좋은 노래 발견했는데 들어볼래?"

 게임도 지겹고 씻기는 싫고 미룰 핑계가 없어서 갖은 수작을 부리느라 노래를 틀었다. 

 "쩔지? 힙하지?"

 둥기 둥기한 리듬에 맞춰서 아무 말이나 떠들고 있는데 남편이 갑자기 생각났다며 문자 메시지 하나를 보여줬다.

 "피 검사 다시 하래. 나 간 수치가 많이 높았나?"

 3개월 전 받은 건강검진 결과 책자를 펼쳤다. 정상 범위를 훌쩍 넘어 있었다. 노래를 꺼버렸다. 

 "다시 해야겠는데?"

 "그래야 하나..."

 혹시 어디가 진짜 안 좋은 거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떨쳐내려고 벌떡 일어나 후다닥 씻었다. 나쁜 생각은 100m 달리기보다 빠르다. 결국 잠을 설쳤다.


 우리 집에서 '득달같음'을 맡고 있는 나는 다음 날 아침 병원이 문을 여는 시간에 맞춰 전화를 걸었다. 오후에 검사받기로 하고 남편에게 이제부터 금식해야 한다고 알렸다. 당일에 결과를 받으려면 2시간 정도 조퇴를 하고 와야 했다. 

 "오늘 점심 삼계탕 먹기로 했는데!"

 약간 투정을 부리면서도 이미 조퇴 신청을 해놨다고 한 걸 보면 아마 본인도 걱정이 됐겠지. 되도록 물도 마시지 말라고 당부하고 전화를 끊었다.


 하루가 길었다. 자꾸만 시계를 봤지만 내 사정에는 관심이 없을 테니 시간은 더디게만 갔다. 칼퇴근을 하고 남편과 같이 병원에 결과를 보러 갔다.

 "정상 수치네요.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의사 선생님의 간결한 소견을 듣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병원을 나왔다. 정상이라 다행이지만 남편 엉덩이를 찰싹 때려줬다.

 "정상인데 왜!"

 "이런 건 바로바로 말하라고! 내가 아주 너 때문에 늙는다고!"

 긴장이 풀려버린 우리는 딱히 배도 고프지 않아 저녁을 건너뛰기로 하고 거실에 앉아 또 게임을(...) 하면서 떠들었다.

 "아까 조퇴 신청하고 부장님한테 얘기하러 갔는데."

 "뭐라 했어?"

 "아니, 무슨 일 있냐고 묻더라고. 간 수치 때문에 피검사 다시 받으러 간다고 하니까 '아무 일 없을 거야.' 하는 거야."

 "... 뭐야, 멋있는 사람이었어?"

 그분은 한동안 남편의 스트레스 유발자였다. 올해 새로운 업무를 맡아 이런저런 걸 시도해 보려고 해도 부장님의 완곡한 반대가 따라붙어서였다. 그때마다 남편이 하소연을 한 판 하면서도 꼭 덧붙이는 말이 있었다.

 "사람은 참 좋거든."

 이제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걱정을 안고 있는 사람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마음 쓰는 사람은 생각보다 드물다. 다음에 또 부장님이 남편을 힘들게 하면 부장님 편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부장님은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니까. 


 +

 "근데 박사님(남편의 선배이자 단짝. 박사 학위가 있다)은 뭐랬는지 알아?"

 "걱정해?"

 "아니? 너 이제 술 못 먹으면 으뜨카냐 이러는 거야!"

 "어허? 박사님 안 되겠네?ㅋㅋㅋㅋㅋㅋㅋㅋ"


+

 사진이 춘식이인 이유는, 부장님 댁 고양이 이름이 춘식이라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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