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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롱 Mar 24. 2020

보리차를 끓이며

요리 멍충이의 '약속'

 내 손으로 이런 걸 쓰려니 부끄럽지만 나는 대단한 똥손이다. 글씨 쓰기 빼고는 손으로 할 줄 아는 게 거의 없다. 딱히 불만은 없는데 먹고사는 일에 다소 치명적인 문제가 생겼다. 발로는 할 수 없는 '요리' 때문에.    

 

 몇 해 전 남자친구 생일에 미역국을 끓인 적이 있다. 엄마한테 물어보고 자료조사도 열심히 했는데 국에선 탄 맛, 쓴맛, 망한 맛이 났다. 

 "우엑."

 항상 웃는 얼굴인 그날의 주인공은 크게 실망했고 결혼하면 요리는 자기가 하겠노라 다짐했다.   

   

 남편은 생수를 싫어한다. 못 먹는 음식이 거의 없는데 유독 물을 가린다. 결혼을 앞두고 나는 프러포즈랍시고 떠들었다.

 "누나가 평생 보리차 실컷 먹게 해줄게."

 약속을 지키기 위해 커다란 전기 주전자와 델몬트 주스병 등 장비를 사 모았다. '우리 집'에 들어온 다음 날, 나는 야심 차게 물을 끓였다. 유리병을 가득 채우고 보리차 팩을 담갔다.     


 노르스름하게 물드는 걸 지켜보자니 이 정도 실력(?)이면 빼앗긴 요리권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충분히 우러난 보리차를 한 잔 가득 따라 남편에게 건넸다. 기대에 찬 표정은 순식간에 구겨졌다.

 "우엑. 맛없어."

 아무리 똥손이라지만 보리차도 못 끓이다니. 나는 크게 실망했고 두 병이나 되는 물을 혼자 다 먹겠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남편은 어제보다 훠얼씬 맛있다며 차가운 보리차를 꿀꺽꿀꺽 마셨다. 뒤늦게 그가 '얼어 죽어도 아이스'였던 것이 생각났다. 다행히 나의 장비들은 오늘도 열일 중이다. 여보, 오늘도 보리차 팔팔 끓여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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