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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롱 May 01. 2020

30대의 제2외국어

시작의 힘

 몇 년 전 처음 일본에 갔을 때, 지금도 기억나는 순간이 있다. 어느 절에 들렀는데 한쪽에서 익살맞은 표정의 스님 인형을 팔고 있었다. 갖고 싶다는 엄마를 대신해서 사러 가니 키가 작고 피부가 흰 할머니 한 분이 계셨다. 나는 더듬더듬 얼마냐고 물었고 할머니는 대답하면서 손가락으로 가격을 알려주었다. 인형들 얼굴이 조금씩 달라서 잠시 훑어보다가 하나를 골랐다. 그러자 갑자기 할머니가 활짝 웃으면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당연히 못 알아들었다. 할머니도 내가 일본 사람이 아닌 걸 아셨을 텐데 손으로 인형 부분, 부분을 가리키며 열심히 설명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며 진심으로 생각했다. ‘아, 알아듣고 싶다. 무슨 얘기일까. 진짜 궁금하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떠들고 다녔다.

 "나 일본어 공부할 거야!"     

 

 놀랍지도 않게 결심은 결심에서 그쳤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면서 새해 목표는 꼭 일본어 공부를 적었다. 스스로 지겨운 인간이라고 생각하다가 문득 그때 그 할머니가 떠올랐다. 내가 조금이라도 알아듣고 좋은 얘기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친절하게 맞지 않았을까. 그래서 시작했다, 일본어 공부.     

 

 밑도 끝도 없이 일본어 능력 시험 온라인 강의를 결제했다. 회사 다니기도 허덕이는 나의 최선이었다. 20대에도 못한 걸 할 수 있을지, 끝까지 듣기나 할 수 있을지 의문과 의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는 믿음 하나로 틈틈이 강의를 들었다. 까막눈이 된 기분은 꽤 생경했다.     

 

 그렇게 두 달이 흘렀다. 한자를 잘 쓰고 머릿결이 참 좋아 보이는 선생님과 (혼자) 부쩍 정이 들었다. 일본어 실력은 딱히 는 것 같지 않았는데 깜짝, 놀랄 일이 있었다.     

 남편이 쓰는 아이패드의 시리는 언어 설정이 (아마도 내가 그런 것 같은데) 일본어로 되어 있다. 그리고 가끔 부르지 않아도 혼자 말한다. 어느 주말, 거실 바닥에 누워있는데 시리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시리에게 물었다.

 "시리 상~ 내일 날씨는 좋은가요?"

 "네, 내일 최고 기온은 16도, 최저 기온은 7도로..."

 나는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어엌 들린다! 들려!!"

 "엉?"

 "시리가! 내일 최고 기온을 알려줬어!"

 남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라도 했더니 무슨 일이 일어났다. 뭐든 안 하는 것보다는 하는 게 낫다는 걸 이렇게 또 배웠다. 공부한들 당분간은, 혹은 아주 오랫동안 써먹을 수 없겠지만 역시 하길 잘했다. 다음엔 또 뭘 시작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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