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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롱 Oct 27. 2020

코로나 시대의 걷기 대회

나 혼자 걷는다

 막내 딱지를 떼고 입봉하면서 만난 나의 사수는 불행과 불만의 대명사였다. 서브 작가 6명을 갈아치운 화려한 경력을 자랑할 때 '저 여자 제정신인가' 생각하는 대신 '내가 7번째가 되면 어쩌나' 겁먹었던 기억이 난다. 나를 자르기 위한 그 사람의 노력과 정성은 대단했지만 버틸 수밖에 없었다. 막내 작가를 오래 한 편이었고 다른 데서 다시 입봉 기회를 잡을 자신도 없었기 때문에. 벌써(?) 20대 중반이라는 조바심도 한몫했다.


 한 달 반 만에 15kg이 빠졌다. 지긋지긋한 불면에 시달렸고 높은 건물이 보일 때면 생각했다. '저기 올라가서 뛰어내리면 그 미친 사람한테 복수할 수 있을까.' 당장 오늘이라도 내가 어떻게 될 것 같아 뭐라도 준비해야겠어서 생각해낸 장기기증이었다. 

    

 다 지난 일이다. 면허증 아래 '장기기증' 네 글자를 볼 때면 그렇게 시달렸던 게 실화구나, 싶은 정도. 죽을 생각은 없어졌지만 장기기증 신청을 취소하진 않았는데 날씨가 선선해질 무렵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로부터 걷기 대회 홍보 메일을 받았다. 요즘 같은 시국에? 싶었는데 무려 '언택트'였다.          


우리 집 택배 탐지견


 참가 신청한 걸 까먹을 때쯤 집으로 택배가 왔다. 장기기증 홍보 리플렛부터 귀여운 인형, 마스크 등이 가득 들어 있었다. 서울 어느 곳이든 3km만 걸으면 된다고 해서 코스를 고민하다가 광화문에서 점심 약속이 있던 날을 디데이로 정했다.   

 맨날 가는 서울역에서 출발. 구석에 서서 사진을 찍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걷기 대회 하는 줄 알았는지 이렇게 쾌청할 수가 없었다. 노래라도 들을까 하다가 오늘은 걷기 대회니까(?) 귀를 열고 천천히 걷기로 했다.      


 어렸을 때부터 걷는 걸 좋아했다. 꽤 먼 거리의 초등학교를 걸어 다녔고 고등학생 시절  밥 먹고 운동장을 걸으면서 내 친구 슈니랑 떠들었던 기억은 지금도 소중하다. 걷다 보면 나쁜 생각은 흩어지고 좋은 생각은 정리된다. 장기기증을 신청한 덕분에 걷기 대회도 하고 왜 걷기가 좋은지도 생각해 보았다.     

 

걷기 대회 참가자의 열정

 

 남대문을 지나 덕수궁과 서울시청 사이에 섰다. 걷기 대회 참가자의 미덕을 뽐내기 위해 인증샷을 열심히 찍었다. 멀리 보이던 광화문이 점점 가까워져 오니 괜히 마음이 찡했다.(가을이라 그런지 부쩍 자주 찡해요.) 이렇게 좋은 날, 튼튼한 두 다리로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시간이었다. 빨리 코로나가 끝나고 다 같이 걷는 날이 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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