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함도 많았지만 평가와 판단이 가득했던 관계를 끊고 나니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일순간에 자각이 되기 시작했다.
"나는 지쳤다."
내가 세상과 사람들 사이에서 맺고 있는 관계를 되돌아봤다. 세심하고 따뜻하고 배려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단순히 사랑받고 싶어서였는지는 몰라도, 내가 맺고 있는 소수의 깊은 관계들에게 내가 기쁨이든, 위로든, 도움이든 뭐든 되고 싶었다. 그게 나의 삶에서 지향할 바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의 대화에서 나는 내 인내심의 한계를 보았다. "속의 무언가가 툭 소리를 내고 끊겼다" 는 말이 문학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임을 30년 인생에서 처음 알게 된 순간,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몰라도 변명하는 상대를 뒤로 하고 그 관계의 모든 것을 한순간에 내려놓아버렸다. 그리고 그 이후로 친구를 만나는 것도, 회사에서 누구와 어울리는 것도, 교회를 다니는 그 모든 일상의 관계들이 어딘가 잘못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해보기 시작했다.
나는 '또 나만 진심이었던' 사람들 말고, 내게 진심인 사람들이 필요했다.
그동안은 나의 위로와 내가 가진 것을 받아가는 관계만으로도 그가 내 곁에 있으니 그것만으로 만족했다면, 이제는 나의 마음과 헤아림, 사랑을 퍼주는 잔고가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 같다.
회사 동료들과는 밥을 같이 먹기만 해도 힘에 부쳤고, 친구 관계에서는 내가 애쓰지 않아도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를 생각하다 버스 안에서 그만 울어버렸다. 그리고 교회. 태어나서 지금까지 다녀왔고 나를 향한 그 사랑에 감사하지만... 그곳애 내가 정말 힘들고 지쳤을 때 나를 붙잡고 함께 가 주었던 사람은 없었다. 어떤 역할로든 섬기려고 노력했지만, 정작 나를 기다려주고 섬겨주는 사람은 없었던 걸 깨닫고 또 많이 울었다.
이렇게 쓰고 보니 헛살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살짝 들지만, 어쨌든 괜찮지 않은 것은 최근의 내 몸과 마음이었고 세상은 여전히 잘 돌아가고 있다. 살면서 마음이 바닥나보기는 처음이라 좀 당황스럽지만 (그러고보니 최근에는 친구들과의 약속을 거의 잡지 않았다) 또 많은 것들이 변화할 시기라 그렇겠구나 짐작만 할 뿐이다.
지쳤다! 정말로 지쳤다! 라고 다시 한 번 말하겠다. 첫 직장에서 강성이나 진상 문의를 받고 나면 우리끼리 "인간 다 죽어야 끝난다" 고 웃어 넘기던 것이 블랙코미디의 한 장면처럼 스친다. 그런데 웃음기가 모두 사라지고 나면 인간사 환멸도 마음 잔고의 일부였음을 알게 된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리에는 미움을 해석할 단어조차 남지 않는다. (지금까지 실컷 말했으면서...)
언제 내 마음이 다시 치고 올라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무조건적인 환대와 사랑, 용납이 지금 나에게는 필요하다. '사회주의 시급하다' 는 토마 피케티의 저서 이름이 떠오르는데, 아무튼 진짜 시급하다. 그와 내가 지금 원하는 바는 좀 다르지만 그도 이런 갈급한 마음으로 외쳤겠지.
그러니 지쳤다. 정말 지쳤다. 누구도 무엇도 사랑하고 싶지 않아. 그러니 좀 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