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성장서사

코로나 시대에도 봄은 옵디다

03.21 일기

by 치슬로

원래는 나갈 일이 없었다가 인스타그램에서 더부스브루잉의 패밀리 세일 얘기를 보고 강남으로 갈 결심을 세웠다. 세일이 5시까지라길래 늦게 일어난 나는 마음이 급했는데, 집안 대청소를 하자는 엄마 말에 꼼짝없이 집에 붙잡혀 버렸다. 결국 내 방 베란다를 치우고, 화장실 청소를 싹 했는데, 동생과 엄마가 내가 화장실 거울 닦아논 걸 보더니 감탄(;;) 하고 거실 베란다 유리도 닦으라고 해서, 그것까지 깨끗이 닦고 강남으로 출발했다.


도대체 언제 봄이 온 걸까, 3월이지만 계속 재택근무를 하고, 바깥에도 잘 안 나가고 학교 개학도 안 하니 전혀 3월이란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지하철 타러 가는 길에 목련이 온통 하얗게 가지를 드리운 것을 봤다. 아무 생각 없이 즐겨 입는 후리스를 걸치고 나왔는데, 날씨는 그렇게 두꺼운 옷은 왜 입고 나왔냐고 책망을 하듯 정말로 따뜻했다. 둘러보니 간혹 패딩을 입은 사람도 있지만, 거의 얇은 트렌치코트나 점퍼를 입고 나와 있었다. 게다가 살색 스타킹! 이제 검은색 스타킹의 시기는 지나가 버린 거였다. 결국 강남역 도착해서 후리스를 벗었다. 너무 따뜻하다 못해 더워서...



지하철로 강남 가는 동안엔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 를 읽었다. '이해' 라는 단편을 읽었는데 사실 제일 재밌는 부분에서 끊어져 버렸다. 보아하니 너무 똑똑해져 버린 주인공이 파멸에 이르게 되는 그런 느낌의 단편이었는데, 저렇게까지 많이 똑똑해질 필요는 없지만 나도 좀 미친듯이 똑똑해져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개발이고 기획이고 전략이고 뭐고 다 잘해서 모두가 날 원하는 상상을 해 봤는데 좀 행복했다.


더부쓰 가서는 미켈러 맥주 (덴마크의 크래프트 맥주 브랜드다) 시음을 잔뜩 하게 해줘서, 맛있는 흑맥주인 비어긱 시리즈(Beergeek breakfast, beergeek cocoa edition 정말 괜찮았다.) 부터 신세계 정용진 회장의 원픽이라는 맥주, 그리고 유자 맥주까지 실컷 시음을 했다.




그러다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나왔던 Ris a la m'ale 가 너무 맛있어서 그냥 그 자리에서 샀다. 체리와 크림 브륄레, 아몬드 맛이 달달하게 여운이 오래 남는 맥주였다. 해외 크래프트 수입 맥주가 750ml 병에 든게 10,000원이면 정말 싼 것 아닌가? 좀 괜찮은 350ml 크래프트 생맥이 10,000원을 호가하는 마당에!! ㅋㅋㅋㅋ 찾아보니까 미켈러에서 직접 운영하는 '미켈러 바 서울' 이 신사동에 있더라. 꼭 가야겠단 생각을 하며 물러났다.


그러고는 교보로 곧장 갔다. 사실 미리 계획했던 건 아니지만 교보를 가기로 결심하고는 오늘 일어나서 그동안 안 썼던 문화상품권을 싹 다 챙겼다. 전부 계산해보니 35,000원 어치. 딱 3권 정도 맘대로 사겠구나 싶어서 기분이 좋아졌다. 우선은 컴퓨터 서가로 가서 학교 도서관에서만 빌려 읽었던 <함께 자라기> 를 집었고... 그 다음으로는 내가 뭘 읽고 싶었더라? 하면서 왓챠 도서 '읽고싶어요' 에 저장해 놨던 목록을 뒤져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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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에서 읽었던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 이 생각나서 세계문학 서가에서 가까스로 끙끙거리며 책을 집었고 (책은 높은 서가에 있었고 내 키는 160이 안 된당 ... )



뒤이어 일본문화 서가로 가서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을 집었다. 오타쿠 문화를 통해 일본 문화를 해석한 책인데, 문득 대학교 1학년 때 들었던 <일본대중문화의 이해> 가 스쳐 지나갔다. 동인녀와 강철의 연금술사로 팀플 보고서를 쓰고, 에반게리온과 OSMU를 배웠던 나날들. 교수님이 우울할 땐 에반게리온을 절대 보지 말래서 아 그럼 정말 기분이 좋을 때만 봐야지! 하고 미뤄둔게 벌써 8년 전이다. 올해는 보긴 봐야 할텐데...



집에 와서는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 Animal Triste> 을 잠깐 읽었는데 이 책의 제목은 라틴어 경구인 "Post coitum omne animal triste est(모든 동물은 섹스 후 우울해진다)" 에서 차용해 온 것이다. 사실 독립출판 시장에서 큰 화제가 된 책 중에 이 경구와 동명인 책이 있어서 이 경구에 대해 항상 궁금해하던 차였다. 한 번 무슨 뜻인지 찾아봤다.


'모든 동물은 성교(결합) 후에 우울하다'(Post coitum omne animal triste est)는 표현에 대한 해석도 흥미롭다. 그리스 출신의 의사이자 철학자인 갈레노스 클라우디오스가 한 이 표현은 '열정적으로 고대하던 순간이 격렬하게 지나가고 나면 인간은 자기 능력 밖에 있는 더 큰 무엇을 놓치고 말았다는 허무함을 느낀다'는 의미다. 한 교수는 이 표현을 소개하며 유학 시절 라틴어와 이탈리아어가 섞인 강의를 이해하지 못해 절망했던 경험을 들려준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공부든, 사랑이든, 무엇이든 목표로 하는 순간을 위해 노력하고 그 뒤에 찾아오는 우울감을 한 번 경험해보라며 격려한다. - <신부님이 전하는 라틴어 표현 속 삶의 태도>, 중앙일보 기사


흠 그렇군. 근데 좀 더 찾아보니 뒤에 생략된 말이 더 있었다. "....præter mulierem gallumque. (인간 여성과 수탉만 빼고)." 고대 그리스 남자들은 뭘 그리 잘 알아서 저렇게 여성과 동물의 성에 대해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정작 저 경구를 차용해서 이야기를 쓰는 사람들은 (최초 발화자가 의도하지 않았던) 여성들이란 점이 굉장히 흥미로웠다. 여튼 <슬픈 짐승> 은 한 차례의 운명적인 사랑 이후 화석화되어가는 주인공의 삶과 혼란스러운 독일 분단 - 통일 시대를 교차시켜 보여주는 책인데, 사실 이 소설 속의 사랑은 너무 듣도 보도 못한 느낌으로 사람을 말려 죽이는 느낌이라 '운명적인' 이란 진부한 수사를 쓰기 싫지만 마땅한 표현을 못 찾아서 그대로 둔다.




한창 "n번방" 이 도마에 오르고 있는데, 이야기하면 할수록 힘들고, 뉴스를 더 찾아볼수록 더 힘들어져서 청와대 국민청원까지는 참여하고 일단 최대한 평정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신상공개와 강력처벌은 물론이고, 이 강간 문화를 끝장내려면 남성들의 지지와 의사 표명도 더욱 적극적으로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26만명은 사실 너무 거대한 숫자라서 이 중엔 분명 나와 어떻게든 연관된 사람도 있다고 생각하면 아득해진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모든게 다 바뀌어야 한다. 사법 제도도, 양형 기준도, 인식도, 싹 다 전부 다.



오늘은 아티클은 따로 못 읽었고, 음악만 조금 열심히 들었다. 오랜만에 펫 메스니의 First Circle을 들었고, 스티비 원더의 <Talking Book(1972)> 을 다 들었다.


한 재작년쯤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새로운 음악을 접할땐 음악을 곡 단위로만 듣지 말고, 그 곡이 들은 앨범을 통째로 들어야 해. 그게 음악가에 대한 예의야. 괜히 그 곡이 그런 식으로 순서가 정해지고, 흐름이 정해진게 아니야." 그때는 '뭐야... 내가 좋아하는 거 알아서 듣는다는데 왜 잔소리야.' 라는 느낌으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는데 갑자기 오늘 그 말이 생각났고, 단번에 이해가 갔다. (이게 바로 돈오점수인가....) 사실 나도 너무나 좋아하는 음악은 아예 앨범을 통째로 100번씩 들어버리긴 한 적도 많긴 한데, 이 말을 완벽히 이해하고 한 것 같진 않다.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좋아하는 음악을 물어보고 우리의 이야기 속에서 언급된 '단 한곡' 을 들어보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그 곡이 들어있는 앨범을 전부 듣는 것이야말로 내가 그들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애정표현이자, 헌신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물론 그 음악을 만든 음악가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도 있겠지만!


"잘 들었어요." 라는 말보다 더욱 더 섬세하게 그 사람이 음악으로 구축한 세계를 존중하는 방법이 뭘까? 갑자기 떠오른 화두로 오늘 일기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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