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성장서사

요절하기엔 늦은 나이

03.23

by 치슬로


"...You don't get to choose if you get hurt in this world, old man, but you do have some say in who hurts you. I like my choices. I hope she likes hers."

이 세상을 살면서 상처를 받을지 안 받을지는 고를 수 없어도, 누구에게 받을지는 고를 수 있지요. 저는 제 선택이 좋아요. 그 애도 자기 선택을 좋아하면 좋겠어요.


<안녕, 헤이즐 The Fault in Our Stars> 중 어거스터스의 대사.



"...신기루는 사막을 걷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넘어지게 하지만 그 어딘가에 오아시스가 정말로 있다는 징표로 기능하기도 한다.하지만, 부지런히 나아간다 해서 내가 빠른 시간 안에 꼭 오아시스에 들러 갈증을 해결할 수 있을거라고, 이 사막을 빨리 빠져나갈 지름길을 찾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온 몸으로 모래바람과 수없이 사그러졌다 일어서는 모래 언덕 위를 걸을 뿐이다.


어쨌든, 나아가고 있잖아. 오늘도 나아갈 뿐이다. 언젠가는 나도 오아시스를 만나겠지- 내가 사막을 걸어보았노라, 그렇게 말할 날도 오겠지."


- 2014년 9월 29일 일기



"...방황은 순례와 같은 것이야." 라고 홍신자 선생이 말씀했다. 정처없이 걷는 와중에도, 그 안에는 묵시가 있고, 설령 내가 그 숨은 뜻을 미처 알아채지 못할지라도 방향성은 여전히 건재하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술이 잔뜩 취해서 갈 지자로 걷는 50대 아저씨와 내가 뭐가 다르지요? 하고 물었을 때, 적어도 나는 아저씨보다 캐내지 않은 삶의 비밀이 더 많고, 그 삶의 비밀이 앞으로도 나를 어떻게든 이끌어 줄 것이란 희망. 그게 뭔지는 나도 모르고, 누구도 말해줄 수가 없지만."


- 2014년 10월 22일 일기



나는 어린 시절에는 엄청나게 똑똑하고 멋진 이단아가 되는게 꿈이었고, 내 친구들 역시도 한번쯤은 이상처럼 시대가 이해하지 못하는 비범한 천재의 모습으로 요절하는 것이 꿈이었다 한다. 이제 11월이면 만 28세가 된다. 27 클럽(27세에 요절한 천재 음악 스타들을 일컫는 말이지만 여기선 만 27세의 어떤 가능성으로 넓혀서 쓰자.) 에 속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하루가 다르게 희박해져간다. 나이에서도, 그동안의 삶에 이룬 것에서도.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우리는 "Too late to die young" 이라는 문구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를 나눈 적 있었다. 이제 우리 요절하기엔 너무 늦었어, 하고 친구가 이야기했다.


짧지만 맹렬히 타오르는 생의 불꽃을, 삶이란 반직선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고 깔끔하게 죽고 싶었는데 막상 그는 회사 다니면서 아파 보니까 요절한 사람들이 흔히 앓았던 '폐병' 에 대한 동경 같은 건 정말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란 걸 알았다 한다. 심지어 사람은 깔끔하게 죽지도 않는다며. 마침 최근 칼럼에서도 그런 얘기를 봤다. "오페라 ‘라 보엠’의 미미,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 두 여주인공이 핏기 없는 얼굴로 기침을 하며 죽어가는 비련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아름다움마저 느꼈다(국민일보, <노승림의 인사이드 아웃>) " 고.


가장 젊고 아름다운 때, 숭고와 비장함으로 삶을 기억하고 싶은 것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의 숨은 소망일지 모른다. 그리고 (평범하긴 죽어도 싫었던 우리지만) 우리도 그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 중 하나임을 본다.


이제 요절이나 예술가의 폐병 같은 것에 대한 치기어린 환상도 모두 걷히고, 20대의 마지막을 맞이한 내가 여기 있다. 그리고 선우정아의 노래 가사는 자주 날 울게 만든다. 도대체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고, 모두가 날 사랑하지 않는 것 같고(분명히 많은 사랑을 받았음에도!) 세상은 너무 힘들던 20대 초중반의 내가 이 가사대로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지금 내 얼굴 어떠니 항상 난 숨이 막히고 답답해
다들 어쩌면 그렇게 평온한 얼굴을 할 수 있는지
이 세상의 무게가 나만 누르진 않을 텐데
머리가 무거워 웃을 수가 없는데
왜 또 다가와 같이 가자 손을 내미는데
난 잡아줄 수 없어
난 거꾸로 서서 세상을 봐
그리고 말을 해 모든 건 잘못됐어
세상도 날 둘러싼 사람들도 모두 삐뚤어졌어
아니 나만

내가 밟고 서있는 게 땅인지 하늘인지 모르겠어
눈에 보이는 모든 게 정말 진짜인지 어지러워
날 지키려 해가 다 지고 있는 엄마의 어깨
애써 눈 맞추며 다가온 그의 입술
분명 같은 곳에 있는데 우린 방향이 달라
난 안아줄 수 없어

난 거꾸로 서서 세상을 봐 그리고 말을 해 모든 건 잘못됐어
세상도 날 둘러싼 사람들도 모두 삐뚤어졌어
아니 나만
그래서 미안해

아름다움에게
어둠을 밝히는 저 환한 빛에게
날 소중히 담은 깊은 두 눈에게
나 땜에 삐뚤어진 너의 상처에
넌 거꾸로 서있는 나를 봐 그리고 말을 해 힘들어 보인다고
세상과 널 둘러싼 사람들과 함께 흘러가자고
방법을 알려줘

(난 거꾸로 서서 세상을 봐) 그리고 말을 해 다 잘못됐어
세상도 날 둘러싼 사람들도 모두 삐뚤어졌어
아니 나만


(선우정아 - 삐뚤어졌어)


엄마의 사랑처럼 여전히 나를 맹목적으로 지키고 있는 소중한 것들이 지금 내 곁에 있고, 방황 끝에 다다를 어딘가에 대한 소망과 기대대로 되지 않은 일들 사이에서 나를 떠나간, 혹은 내가 떠나 보낸 관계들이 있고, 그리고 거꾸로 서 있다가 어느 정도 제 자리로 돌아온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


이제 세상과 늘 함께 흘러가진 못하더라도, 나에게 눈을 맞추며 다가올 사람을 사랑할 준비가 되었는가.

가끔 다시 거꾸로 돌아가는 날에도 모든게 다 잘못되지만은 않았음을 스스로에게 일깨울 수 있는가.

그리고 쉽게 죽지 않고 지난한 삶의 흐름을 통과할 내 자신을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는가.


스물아홉의 내가 나에게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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