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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드로잉

by 바이올렛

긴 연휴의 마지막날 새벽, 눈을 뜨자마자 소소한 집안 정돈을 시작했다. 베란다 물청소까지 마쳤을 때 생각했다. 서울에 가야겠다고. 오래전부터 마련해 놓은 아지트라곤 광화문 교보문고뿐이었는데 이번엔 새로운 곳에 가보고 싶어졌다. 좋아하는 작가님의 블로그에 들어가 그녀의 과거 발자취를 탐색해 보았다. 남산 주변 산책길을 소개해놓은 글을 보고 서울역으로 향했다. 거기에서 도보로 이동하여 남산 자락을 걸어볼 요량이었다.



원래 마시지 않던 커피를, 디카페인으로 주문해서 마시다가 요즘엔 매일 생각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카페에 가서 쌉싸름한 카페라테를 한 잔 시작하고 싶어 들어갔다가 널찍한 매장의 분위기에 반해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커다란 창밖으로 과거 서울역이 한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가. 배낭 속에서 노트를 꺼내 빈 종이에 구도를 잡기 시작했다.



완성할 거라는 생각으로 시작한 게 아니다. 구 서울역의 딱 벌어진 어깨를 보고 있자니 내 어릴 때 이야기가 떠올라 그 추억을 되짚으며 시작된 자연스러운 그림 그리기였다. 엄마 아빠 손을 잡고 서울역을 찾았던 네 살 무렵의 나는 사람의 파도를 뚫고 매표소로 향하던 부모님의 손을 놓쳤다고 한다. 여기서 잠깐 기다리고 있어, 라며 자리를 비운 어미 아비를 떠나 나는 한 발자국씩 환하게 바깥으로 뚫린 출입문을 향해 걸어갔다고 한다. 막 부모님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에 기적적으로 발견되어 지금의 내가 있게 된 것이다. 그때 만약 발견되지 않고 역사 바깥으로 나가버렸더라면 나는 어떤 모습의 어른이 되어 있을까?



그 상상에 심취하며 서울역을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손은 부지런하게 펜 드로잉을 이어갔다. 이 문이란 말이지? 이 문 밖으로 한 발자국씩 걸어 나갔다고 했지? 하면서 펜을 움직였다. 그림 그리던 초반엔 자꾸 눈물이 나올 것처럼 마음속에서 눈물샘이 일렁였다. 그림 그리는데 왜 눈물이 나? 싶기도 하지만 이건 복합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10여 일간의 긴 추석 연휴 동안 회사와 떨어져서 그동안 잊고 살았던 나의 말랑한 감성을 발견했다는 기쁨, 이렇게 회사 없이 자유인으로 살고 싶다는 간절함, 어릴 때의 특별한 이야기를 품은 서울역 건물에 대한 반가움, 앞으로 그림 그리며 살 운명일 것 같다는 직감이 어우러져 다른 인생을 자꾸 상상해 보게 되었다. 그게 눈물샘을 자극했다.



바닥 수평선, 가운데 세로선, 가장 높은 선 순으로 먼저 중심을 세운 후에 왼쪽-오른쪽 순으로 건물을 그렸다. 건축을 배우겠다며 도면을 그리던 손, 업무 하며 수없이 도면을 보던 눈으로, 건물 드로잉을 하는데 이 역시 마음을 일렁이게 했다. 잘못 선택했다고 여겼던 전공, 연이어 잘못 선택했다고 여겼던 업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건물을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종이와 펜을 꺼내서 그림으로 그리고 있는 내 안의 선택을 묵묵히 따르고 받아들였다.



어떻게 시간이 흘렀을까. 초콜릿 케이크 하나와 디카페인 카페라테가 쟁반에서 사라지는 동안 3시간이 흘렀고 내 앞에는 종이 위에 서울역이 높여있다. 그림을 그리며 중간중간 사진을 찍었는데 이것이 훗날 어떻게 사용될 지도 내심 상상해 보았다. 직장을 다녔어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20년이나 입었네요.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서울역이 잘 보이는 카페에 앉아서 내리 세 시간을 꼬박 그림만 그렸어요. 그렇게 완성된 그림이에요, 라면서 강연하게 될 내 모습을.



그림은 내 마음속 깊은 곳의 간질간질한 부분을 자극하는 촉매제이다. 펜이나 연필을 잡은 손이 움직이면 곧잘 울고 싶은 마음이 든다. 소비를 줄일 순 없으니 수입이 끊기면 안 된다는 절박함으로 외줄 타기 같은 직장생활을 하고는 있지만, 단 한 번도 마음 편안했던 적 없는 이 일을 언제까지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끝없는 막막함에 혼절할 것 같이 살고 있는 게 들키는 기분이다. 너에게도 그림 그리며 행복해하던 순수한 과거가 있었잖아, 회사의 쫓김을 받으면서도 써야만 하고 그려야만 살 수 있는 너의 감수성이 있잖아, 그걸 어떻게 숨기고 살려 그래. 채근하는 목소리를 느끼며 펜을 움직이는 마음은 어쩌면 절망에 가까운 건지도 모른다. 지금 이 상황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할 거라는 좌절을 딛고 선 하나씩을 그려내는 지도 모른다.



이 그림은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 딸에게만 보여주었다. 그림 그리는 것에서 마음속 행복을 느낄 줄 아는 그녀와 그림 대화가 가능하다. 엄마가 어릴 때 서울역에서 길을 잃어버릴 뻔했거든, 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딸에게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내 그림을 찬찬히 바라보는 딸의 옆모습에서 어릴 때 나를 발견한다. 크레파스와 물감의 냄새와 질감을 좋아하고, 흰 종이를 받아 들고 알록달록한 상상을 하던 맑고 순수하던 시절을. 웃음기 빠진 얼굴로 일상을 살고 있지만 여전히 내 안엔 살아있을 그 시절과 그 시절의 나를 품고 오늘도 서서히 밝아오는 아침을 맞는다. 출근해야 하는 아침을, 다시 하루치 연극을 해야 하는 그 자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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