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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라 Nov 01. 2020

한 여름밤의 다락방

이상한 나라, 앨리스가 되는 마법  ㅣ 제주

호기롭게 퇴사한 직후, 더 이상 일상적이지 않은 일상 속에서 즉흥적으로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 

강박적으로 매일 규칙적인 생활을 해왔던 사람은 관성에 의해 속도를 제어할 줄 몰랐다. 의도적으로 멈추어야 했다. 반복적인 무력감이 찾아올 때, 고민을 털어버리고 싶을 때 마다 제주를 찾던 기억이 떠올랐다. 제주라면 출장으로도 여행으로도 십년 동안 몇십번을 홀로 갔으니 마음이 편안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왕복이 아닌 편도로 일단 내일 가보자. 

그저 무심하게
 가고 싶을 때 가고, 오고 싶을 때 오고
그런 자유를 이젠 누릴 수 있었다.  


뜨거운 여름의 정중앙, 온통 신록으로 가득했던 칠월. 

강산도 바뀌었을 십 년이라는 세월을 다녔던 회사를 온 마음으로 고민한 끝에 그만두고 나온 직후였다. 뜨거웠던 여름엔 밖은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듯, 내 마음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한 채 온통 시원 복잡했다.  


전날 편도 티켓을 끊고 출발하는 다음 날 아침. 속도 모르고 파랗게 타오를듯 맑은 하늘이다. 제주공항에는 온통 휴가객들로 들뜬 표정의 여행 무리들로 북적인다. 홀로 계획도 없이 짐을 지고 내려온 나는 아주 잠깐 어딜가지 머뭇거렸다. 공항에서 시외버스를 기다리며 한여름 폭우가 쏴아하고 시원하게 쏟아지길 간절히 바랬을지도 모른다. 

거센 폭우 속에서 마음까지 차오를 것만 같은 빗소리를 듣고 나면
그동안 묶어온 내 마음이 다 씻겨내려갈 것 같았으니까.
그러고 나면 모든 게 괜찮아져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첫 숙소 외에 아무것도 정하지 않고 내려와서 혼자 더 머물 곳을 즉흥적으로 골랐다. 생각도 마음껏, 책도 마음껏 읽고 싶었다. 사실, 생각의 물음표가 부유한 채 복잡한 머리를 이고 살았던 그때, 책 속에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구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찾아간 곳은 송당리 중산간 마을에 고요히 자리한 북 스테이 <생각의 오름>. 


북스테이 컨셉이 알려지기도 전인 일년 전 무렵, 이곳으로 나를 이끈 것은 아름다운 공간과 다양한 살아가는 이야기. 지금 생각하면 세상에는 다른 삶을 선택한 사람들의 다양한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려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의 출입문을 통과해 나를 이곳으로 누군가가 보낸 준 것만 같았다. 이 곳은 낮에는 <제주 살롱>이라는 멋진 북까페 겸 작지만 커다란 영혼을 간직한 인문학 책방으로, 밤에는 <생각의 오름> 이라는 두 칸의 아담한 다락방에서 온통 생각의 바다에 빠져 머물다 갈 수 있는 아름다운 공간이다.


이 곳에선 이틀만 머물 생각이었는데 송당마을에 도착한 후부터 거센 빗줄기가 내리친다. 

"뉴스 속보 입니다. 태풍이 제주도 상륙 직전으로 제주 출도착 비행편은 모두 결항입니다." 

이건 머지..오늘부터 여행은 커녕 아무것도 못하게 생겼는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마냥 슬프지만은 않은 반가움이 뒤섞여있다. 완전히 육지로 가는 길이 막히면 속절없이 이 섬에서 충분히 눌러앉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게 기쁨으로 돌아오는 희한한 마음이랄까. 백수가 되면서 조금은 눈치가 보이던 터라 기막힌 나로서는 호재에 마음이 더 편안해진 것이다. 무엇이든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는 마음으로, 지금의 나와 같은 상황을 온 힘을 다해 맞아보고 싶어 졌다.

  

그렇게 태풍과 시작된 중산간 마을 송당리와의 인연은 이곳에 푹 빠지게 만들었다. 

태풍이 지날 갈 때까지 지붕 아래 소담스러운 다락방은 그렇게 나의 작은 거처가 되어주었다.


@제주살롱


천천히 이곳의 공기를 들이쉬며, 들숨 날숨. 일층에 책이 가득한 서가와 삼층의 다락방의 아늑한 공기는 마치 내가 지금껏 마주해 온 세상과 다른 이상한 나라 앨리스가 헤메던 숲속 길에 들어선 기분을 안겨주었다. 일층의 북까페 서가에서 그동안 누군가 스쳐간 책등을 메만져 본다. 그러다 마음이 닿는 책을 만나 책을 펼쳐 보면 오래전사장님의 고민과 그 마음에 닿은 밑줄이 열심히 춤추고 있었다. 책 한 권에 책 주인의 치열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마치 그 당시 나와 같던 누군가의 마음이 나에게 내려앉는 경험이랄까... 그렇게 나흘 밤동안 보이지 않는 마법이 나에게 스며들고 있었다. 


그렇게 우연히 릴케의 책을 펼치게 되었다. 


당신은 당신의 눈길을 외부로만 향하고 있는데 무엇보다 그것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당신에게 충고하고 당신을 도울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당신에겐 단 한 가지 길 밖에 없습니다. 당신의 마음 깊은 곳 속으로 들어가십시오. 가서 당신에게 글을 쓰도록 명하는 그 근거를 캐보십시오. 그 근거가 당신의 심장의 가장 깊은 곳까지 뿌리를 뻗고 있는지 확인해보십시오.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라이너 마리아 릴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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