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불가능한 아랍에서의 삶
두 달 전부터 재 계약 갱신에 대한 연락을 싸그리 무시하던 집주인이 계약일 2주를 남겨놓고 답장을 했다.
렌트비 6.5%인상을 요구하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가란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남편은 구걸에 가까운 협상(3년이나 살았으니 온정을 좀 베풀어 달라는)을 했지만 그들은 끝까지 무례했다.
"우리가 무슨 호구인 줄 아나. 그 돈 올려주느니 나가고만다!" 라고 호기롭게 지르고야 말았다.
3년 전 우리가 이 집을 선택했던 그때로 되돌아가보자.
아부다비에 첫 발을 내디딘 우리에게는 안타깝게도 정착에 도움을 받을 곳이 마땅치 않았다. 당시에는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이기도 했고 남편의 전임자가 귀국을 한 후 집을 구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조언받을 데도 없었다. 주변에 알음알음 알게 된, 일 잘한다는 인도 부동산 중개인 한 명에 의지한 채로 집을 구하기 시작했다.
중개인 말로는 계약 3주 전에 집을 정하는 게 일반적인 관례이니 그때부터 집을 보러 다니 자고 했다.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당장 눈앞에 펼쳐진 아이들 학교 적응에만 온 힘을 쏟았다. 덕분인지 아이들은 초반 적응엔 무리 없이 학교 생활을 시작했다.
결국 30도 중반을 넘어가는 숨 막히는 5월에 집을 보러 다녀야 했으며 닥쳐서 구하다 보니 선택지도 없었다.
(나중에 알고 봤지만 이렇게 3주 전에 구하는 게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다. 계약자와 상황에 따라 사전에 매물이 나오기도 하며 귀임 예정인 지인이 있는 경우 물려주는 형식으로 계약을 하기도 한다.)
이 인도 중개인의 일처리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아 인터넷을 검색해서 괜찮아 보이는 매물을 가진 중개업소에 연락을 돌렸다.
신기하게 답장이 오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한국인 부동산 중개인에 의하면 우리가 집을 구하는 이 5월이 가장 매물이 없는 시기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의 학교는 9월에 신학기가 시작되며 3학기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이동이 많은 것은 역시 아이들의 학교를 고려한 방학기간이다. 5월은 한창 아이들이 학교를 다닐 시기이니 확실한 이사 비수기 시즌이다.
결국 우리는 그 인도 중개인이 추천한 매물을 하나 골라 당장 계약을 맺자고 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아랍의 꽤 이름 있는 은행이었던 집주인이 연락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임시로 머물고 있던 레지던스에서 퇴거할 날과 한국에서 오고 있는 이삿짐을 받을 날짜는 점점 다가오고 있고 그동안 봐뒀던 매물들은 소진이 되었다.
우리에게 남은 카드가 단 한 장이었던 그 순간, 중개인을 통해서 연락을 받았다.
“집주인이 드디어 연락을 줬어. 그런데… 이런 말 하기 좀 그런데 그들은 이 매물을 빌려주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아.”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집주인이 어떻게 집을 빈 채로 두고 싶어 하지?
그리고 몇 년이 지나며 아랍 짬을 먹고 나니 집주인 (그 은행 담당자)의 태도가 이해가 되었다.
회사 소유이니 나가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고 안 나가면 신경 쓸 일이 줄어드니 더 좋다. 는 마인드였던 것이다.
직업윤리가 빡센 한국인으로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인샬라의 나라인 여기에서는 종종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그때에도 거의 빌면서 이 집에 들어와 보니 계약 조건과 다르게 기본적인 청소는 커녕 바닥에는 죽은 벌레들이 한가득이고 수도와 전기도 끊겨 에어컨도 나오지 않았는데(35도에) 집주인이 밀린 요금을 내지 않아서 그렇다고 했다. 결국 호텔에 머물면서 집을 정상화시키기 위해 수도 없이 전화하고 발로 뛰어야했다.
그랬던 그들의 렌트비 인상에 관한 반응을 예측하지 못한 건 어찌 보면 나의 실책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그들이 렌트비 인상을 주장하는 데에는 몇 가지 근거가 있다.
지난 3년간 두바이의 렌트비는 매년 두자릿수로 증가했다. 두바이의 호황 덕분에 내가 사는 지역에도 매년 5%가 넘는 인상이 지속되고 있다.
러-우 전쟁으로 은행 계좌가 동결된 러시아 사람들이 대거 두바이로 몰려와 렌트비 폭등을 일으켰다. 러시아에는 부자만 사는 것인지 팜 주메이라의 초호화 주택들을 사들였다.
최근에 벌어진 아랍의 상황들로 치안이 좋은 두바이로의 유입은 늘어났으며 그렇게 들어온 자금 덕분에 최근 몇 년간 호황이니 투자자들 또한 몰릴 수밖에.
부동산에 중국 자본이 대거 유입되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개인 투자도 늘었다. 내 인도 지인들은 공동투자를 시작했다. 후분양이 일반적인 이곳에서 싼 가격에 선분양을 받고 완공되면 되파는데 수입이 꽤 짭짤하다고 귀띔해줬다.
호황인 그들과는 대조적으로,
점점 더 줄어들어 가는 우리의 예산은 결국 이사를 열흘 앞둔 이 시점.
집을 다시 구해야 하는 비극을 만들어낸 것이다.
아부다비에 3년을 살아서 인지. 나와 남편은 불안해하지 말고 뭐가 되든 받아들이자고 했다.
아랍에서 만나는 숱한 이런 상황을 견뎌보니 조급해한다고 상황이 나아지지도 또 그렇다고 나빠지지도 않았다.
집주인과 협상이 안되면 안 되는 대로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보고 뭐 이마저도 안되면 저기 사막에 텐트 치고 베두인처럼 살자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