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난임이라고요?!
다소 시니컬한 가족관을 가지고 있던 남편은 결혼 전부터 '아이는 선택', '없어도 괜찮다'는 말을 자주 했다. 반대로 난 '아이는 필수',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30대 초까지만 해도 세 아이 엄마를 꿈꾸던 나였다. 하지만 한해 한해 결혼이 늦어질수록 바라는 아이의 수도 줄었다. 그리고 실제 결혼을 한 30대 중반엔 소박하고 현실적으로 하나만 바랄 뿐이었다. 짧은 연애 기간의 아쉬움을 달래며 달콤한 신혼 생활을 보낸 지 1년 여쯤 지난 어느 날, 남편은 마음을 조금 바꾸어 아이가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마침 난 신혼 재미에 푹 빠져 '아이 없는 삶도 괜찮지 않을까' 갈등하기 시작했는데 말이다. 긴 고민은 필요 없었다. 따뜻하고 다정한, 그리고 무척이나 섹시한 뇌를 가진 한 남자와의 오붓한 삶도 탐났지만, 아이와 꾸려가는 미지의 삶도 너무나 궁금했다. 이렇게 우리 부부의 자녀 계획은 합의에 이르렀으나 의외의 복병은 또 이럴 때 등장하는 것이 아니던가. 관심 없을 땐 그렇게 규칙적이던 생리가 얄궂게도 들쭉날쭉 변덕을 부리기 시작했다.
똑똑! 아이를 갖고 싶어요.
몇 달의 임신 시도 끝에 마음이 조급해진 우리는 난임 클리닉을 찾았다. 그 자체가 워낙 유쾌할 것 없는 곳이긴 하지만 난임 클리닉에서의 내 첫 경험 역시 별로 유쾌하지 않았다. 난임 검사 필수 항목인 호르몬 검사와 나팔관 조영술, 남편의 정자 검사까지 마치고 검사 결과를 들으러 간 날이었다. 무미건조한 표정의 의사는 내게 검사 결과가 좋지 않다며 남은 기회(?)가 별로 없다고 말했다. 당장 시험관 시술을 시작하자며 성공 케이스와 실패 케이스를 줄줄이 늘어놓았다. 심지어 '아이를 낳기 위해 결혼을 하는 건 아니지 않냐'며 '입양도 충분히 좋은 방법'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입양에 대한 편견이 있는 것은 아니나, 임신하고 싶어 찾아간 사람에게 입양이라니...! 그것도 몇 번 본 적도 없는 내게 말이다.
처음엔 너무 당황스러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이를 가지지 못할 수도 있다니,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냉혈한 같은 의사 앞에서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쏟으며 얼굴도 마음도 엉망이 된 채 병원 로비로 내려왔다. 마침 퇴원 수속을 밟고 있는 산모 몇몇과 신생아들이 눈에 들어왔다. 퉁퉁 부은 산모들은 왜 그리 대단해 보이고 그 품에 안긴 아기들은 또 얼마나 예뻐 보이던지... 처음 보는 광경이 아니었음에도 그날은 그렇게 아련하고 먹먹할 수 없었다.
이후로도 그 의사에게 몇 차례 더 진료를 받았다. 지금 크고 있는 난자부터 바로 채취를 시작하자고 재촉한 탓에 난자가 얼마나 크는지 초음파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초음파 검사를 받을 때마다 그는 "아, 난자가 너무 안 자라네" 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병원에 갈 때마다 너무 스트레스를 받고 의사 앞에 앉을 때마다 주눅이 들었다. 난자가 빨리 안 자라는 것이 내 잘못 같았다. 그러다 어느 날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다가 더 임신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우린 다른 병원을 찾아보기로 했다.
두 번째로 찾은 병원은 난임 시술 관련해 가장 이름이 많이 알려진 곳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의사를 선택해 한 달 넘게 기다린 끝에 첫 진료를 보게 되었다. 이 사람도 내게 임신 시한부 선고를 내린다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자문하며 기다린 날이었다. 연륜이 깊어 보이는 그는 내 검사 결과지와 초음파 영상을 보고 그리 비관적이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호르몬 수치는 좋지 않으나 경험적으로 봤을 때 그리 나쁜 상태는 아니란 거다. 자연 임신을 좀 더 시도해보고 그래도 안되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고 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를 주치의로 결정했고, 그 후로 1년 남짓 병원에 다니는 동안 그 선택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병원의 도움을 받고 있지만 임신을 준비하는 과정은 건강하고 즐거웠으며 진료 때마다 좌절보단 희망을 가지고 돌아온 적이 더 많았다.
안 되는 게 아니라 조금 늦을 뿐.
나의 이런 경험을 아는 지인이나 후배들은 종종 난임 클리닉 선택에 대해 조언을 구한다. 그때마다 내가 가장 먼저 이야기하는 것은 헛되지 않은 선에서 희망을 주는 의사를 선택할 것. 난임을 극복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힘겹고 지치는 일인데 의사마저 지나치게 현실적이거나 비관적이라면...? 아마 내가 만난 첫 의사에게 계속 진료를 받았다면 지금 이렇게 편안하게 지난 일을 회상할 수 있을까 싶다. 병원에 자주 갈 땐 일주일에 세 번 이상 주치의를 만난다. 기왕이면 희망적인, 가능하면 유머감각도 좀 있는 의사를 선택하길 권한다. 물론 경험과 실력에 대한 검증은 필수. 요즘은 의사뿐 아니라 배양팀의 실력까지 따져보고 병원과 의사를 선택하는 이들도 있다. 덧붙이자면 난임 클리닉과 산부인과가 분리되어 있는 병원을 선택하면 오가는 길에 어여쁜 신생아들을 보며 괜한 자괴감이나 우울감에 빠지는 일도 어느 정도 방지할 수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처음 만난 의사는 일종의 공포 마케팅 전문가였던 것 같다. 임신을 하고 싶다고요? 나이는 35세 넘었네요. 호르몬 수치도 별로 안 좋고요. 이런 경우 시간 끌지 말고 시험관 시술을 하세요. 자연 임신보다 성공률도 높아요. 한 10% 정도. 그리고 비용도 비싸죠. 회당 3-400만 원 정도? 당신의 난자는 지금 매진 임박, 품절 직전입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시작합시다. 마음의 준비는 차차 하시고요. 아, 그런데 임신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어요. 되면 다행이고 아니면 입양도 좋은 방법입니다.... 해석하자면 이런 느낌이었고, 나는 임신 확률을 높이고 그는 병원의 수익을 높이는 길이 바로 시험관 시술이었던 것이다.
내가 다소 삐딱한 걸 수도 있지만 병원도 비즈니스고, 수익성이 중요할 테니 요즘처럼 출산율이 날로 감소하는 때에 산부인과마다 우후죽순 난임 클리닉이 생기고 시험관 시술이 증가하는 것은 고객의 필요와 병원의 필요가 맞아 떨어 지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난임 클리닉을 선택할 때 병원의 규모와 난임 클리닉에 대해 어느 정도 검증하는 것도 중요하다. 병원마다 난임 시술 성공률을 공개하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런 병원은 거의 없다. 큰 고민 없이 선택했던 첫 병원에서 쓴맛을 제대로 본 나는 이후 병원 홈페이지에 공개된 성공 사례와 후기를 꼼꼼히 읽어보고, 건너 건너 수집한 지인들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어느 정도 규모와 시스템이 갖춰진 병원을 선택했다.
가깝고 규모가 작은 병원은 섬세하고 편안하게 케어를 받을 수 있고 다니기도 편하지만 구체적인 성공 사례나 배양팀의 실력 등을 검증하기가 다소 어렵다. 반면 규모가 크고 유명한 병원일수록 진료 대기 시간도 길고 섬세한 케어를 기대하긴 어렵지만, 축적된 경험과 데이터가 많고 불필요한 과잉 진료를 하지 않는 것이 장점이다. 남의 남은 난자 개수를 가지고 매진 임박을 외치며 공포 마케팅을 할 필요 또한 없을 것이고. 결국 선택은 개인의 몫이지만 누군가 난임 클리닉을 찾고 있다면 쇼핑하듯 똑똑하게 비교하고 따져본 후 선택하기를, 나처럼 처음부터 너무 좌절하고 상처 받지 않기를 바란다. 차가운 겨울날 처음 찾았던 난임 클리닉은 그날의 공기만큼 싸늘하고 착잡했지만, 어느덧 두 해가 지난 지금은 숨소리만 들어도 심쿵하는 아기들과 따뜻한 체온을 나누며 벌써 두 번째 겨울맞이를 준비하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