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Becoming mom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winssoon Nov 27. 2018

난임 클리닉에서 생긴 일

나는 이제 임.준.생(임신 준비생)!

 본격적으로 난임 클리닉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대학원은 논문만 남겨 둔 채 휴학하고, 한 달에 적어도 4-5 칼럼씩 진행하던 프리랜스 에디터 일도 모두 그만두었다. 대학원생도 아니고, 직장인도 아니고, 전업주부라 하기엔 집안 일도 딱히 제대로 한 건 아니라서... 난 스스로를 '임준생(임신 준비생)'이라 소개하곤 했다. 듣는 사람들은 주로 웃어넘겼지만 당시 나는 진지하게 취준생과 임준생의 비슷한 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1. 언제 졸업할지 모른다(난임 클리닉에 다니는 사람들은 임신에 성공해서 일반 산부인과로 옮겨가는 것을 '졸업'이라고 표현한다).

2. 성적순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한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다.

3. 안 될 땐 간절히 원하지만 되고 나면 또 다른 '헬 게이트 hell gate'가 열린다(겪어보니 헬 게이트까진 아닌 것 같지만).     

인생 최초로 겪는 '사회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상태의 삶'이 꽤 당황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진 않았나 보다.

 

안녕, 나의 난자들아!


 다짜고짜 시험관 시술을 권했던 첫 번째 병원과 달리, 내가 다니기로 마음을 정한 병원에서는 난자가 자연적으로 자라는 과정을 잘 관찰해서 임신 성공률이 높은 날짜를 지정해주고 이에 맞춰 임신을 시도하는 방법을 먼저 해보자고 했다. 이때부터 인생 최초로 난자와의 대화를 시작했던 것 같다(난임 클리닉에 다니면서 인생 최초로 하는 것이 참 많았다). 특별히 관심 주지 않아도 내 몸속에서 꼬박꼬박 자라 매달 붉은 흔적과 강렬한 통증을 남기고 가던 그 수많은 난자들과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대화를 말이다. "오늘은 3mm나 자라주었구나", "이번엔 왜 이렇게 안 자라니?", "왜 두 달째 한쪽 난소에서만 나오니?", "배란은 잘 된 거니?"... 물론 남들이 들을 정도로 말하진 않았다.


 난임 클리닉에 다니면서 내 몸과 임신 과정에 대해 새삼 알게 된 것이 많다. 두 개의 난소에서 매달 번갈아가면서 난자가 배출되는 것이 아니라 한쪽 난소가 더 열심히 일하기도 한다는 것, 양쪽 난소에서 보글보글 난자가 자라는데 자라는 속도나 크기도 제각각이고 마지막 순간까지 어느 것이 나올지 모르는 스릴감, 병원에서 '날짜를 잡는다'는 것은 그냥 한 번 진료받고 날짜를 지정받는 것이 아니라 2~3일에 한 번씩 초음파 검사를 통해 하나하나 난자들의 크기를 재면서 거의 배란 직전까지 추적하는 대단한 노력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 그리고 아쉽게도 가능한 모든 조건이 충족되어도 자연 임신에 성공할 확률은 25% 정도에 불과하다는 사실 등이다.


 이렇게 그리 자연스럽지 않은 자연 임신 시도는 몇 차례로 종료. 몇 차례라 해도 기회가 한 달에 한 번뿐이니 그렇게 아쉽게 몇 달이 지났다. 다음 단계는 내 배에 직접 호르몬제를 주사해 난자를 키우고 배란일에 맞춰 임신을 시도하는 방법이었다. 이것 역시 난임 클리닉에선 비교적 자연적인 임신 방법에 속한다. 쉽사리 적응되지 않는 손놀림으로 몇 달간 부지런히 내 배에 주삿바늘을 찔러가며 노력했지만 결론은 실패. 이른 봄부터 시작해 이렇게 몇 달이 지나니 벌써 깊은 가을이었다. 비록 임신에 성공하진 못했지만 몇 달간 난임 클리닉에 드나든 시간이 헛되진 않았다. 늘 진료 대기실을 가득 채운 '나와 비슷한 그녀들'을 보며 조용히 위로받았고, 마음처럼 자라주지 않는 내 난자들을 통해 기다리는 법을 배웠으며, 희비가 교차하는 낯선 이들의 얼굴에서 희망을 찾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생각할수록 겁만 나던 난임 치료(시술)에 대한 두려움도 조금은 극복할 수 있었다.


(좌)날짜를 '받았다'. 다행히 내 주치의는 '숙제'라는 말 대신 귀여운 하트를 그려주었다. (우)내 배에 직접 찔러야하는 주사를 처음 처방 받은 날. '이제 시작이구나' 싶었다.


자연 임신의 꿈은 저 멀리...


 때마침 주치의는 내게 시험관 시술을 고려해보자고 했다. 그땐 나 역시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고 일단 '딱 한 번만 해보자' 마음먹었다. 시험관 시술의 모든 과정은 잡념이 전혀 끼어들 틈 없이 매우 체계적이었다. 호르몬 주사를 맞으며 여러 개의 난자를 키우고, 난자들이 충분히 자랐을 땐 채취 전 자연 배란되는 것을 막기 위해 배란 억제 주사를 맞는다. 그리고 난자 채취 36시간 전엔 다시 배란을 촉진하는 주사를 맞는다. 평소 인위적인 것을 싫어해 비타민이나 영양제도 잘 안 먹던 내가 이 모든 걸 직접 내 몸에 주사하는 것도 무척 낯선 경험이었지만, 내 몸이 이 호르몬제들이 이끄는 대로 꼬박꼬박 움직이는 것도 신기했다. 키우라면 키우고 멈추라면 멈추고 내보내라면 보내고...

   

 난자를 채취할 땐 수면 마취를 하는데 그전에 혹시라도 채취 중 몸이 움직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내 손발을 수술 의자에 묶는다. '손발을 묶는다니...' 미리 경험담을 찾아봤을 때 가장 멈칫한 내용이었는데, 막상 수술실에 들어서면 모든 일이 순식간에 진행되기 때문에 그 자체가 특별히 끔찍한 기억으로 남진 않았다. 다만 나를 둘러싼 간호사들의 일사불란한 움직임과 그날 수술실의 차가운 공기는 지금도 가끔 생각날 만큼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의식이 사라진 사이 내 난자들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에 나왔다. 마취에서 깨어나자마자 내가 제일 먼저 한 말은 "몇 개나 나왔나요?". 순서대로 난자 채취를 하고, 순서대로 나란히 회복실 침대에 누워있던 커튼 너머의 그녀들보다 적은 개수였다. 순간 피식 웃음이 났다. 내 평생 남과 난자 개수를 비교할 일이 있을 거라 상상이나 했던가. '중요한 건 단 한 개니까' 스스로 위로하며 집에 돌아왔다.


 다행히 나의 몇 안 되는 난자들과 남편의 정자들은 시험관 안에서 만나 수정이 잘 되었고, 3일 후 배양된 수정란을 이식하게 되었다. 이식 과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마취도 필요 없었다. 수술실 침대에 눕자 커다란 모니터에 내 수정란들의 사진이 나타났고, 초음파로 자궁을 비춰 보면서 수정란을 이식하는 것이 끝이었다. 그리고 약 2주 뒤 혈액검사를 통해 성공 여부를 확인한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차가 조금만 흔들려도 내 수정란들이 잘못될까 불안하고 겁이 났다. 또 내 자궁이 갑자기 나타난 이 수정란들에 어떻게 대처할까 궁금하고 기대됐다. 말할 필요 없이 기다림의 2주는 길고 길었다.                    


임신인가요?


 2주간 먹기, 눕기만 반복하다 드디어 혈액검사 날이 되었다. 진료실에 들어서자마자 내 주치의는 "임신했죠?"라고 물었다. "아니 전 오늘 검사하러 왔는데요". 대부분 혈액검사 전에 집에서 임신 테스트기로 검사를 해보고 병원에 간다고 하던데 난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숱하게 봤던 한 줄짜리 테스트기를 또 보고 싶지 않기도 했고. 선생님은 웃으며 "수정란 상태가 정말 좋았어요. 임신했을 거예요. 검사하고 가세요"라고 했다. 상태가 좋은 수정란이란 뭔가 궁금했지만 매일 수많은 수정란을 보는 분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좀 더 기대감이 생겼다.


 혈액검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 또 침대에 누워 기다린 지 몇 시간... 전화가 울렸고 병원 번호였다. 늘 밝은 담당 간호사님의 목소리가 유독 더 밝고 약간은 흥분한 듯 들렸다. "수치가 너무 높아 깜짝 놀랐어요. 1000이 넘어요. 축하드려요." 100만 넘어도 안정권이라는 임신 호르몬 수치가 1000이 넘는다니! 심장이 귓가에서 미치도록 쿵쾅거렸다. 그전까지 내 인생의 가장 흥분된 통화는 10여 년 전 입사 시험 합격 전화를 받았을 때였는데, 이 순간은 그에 비할 수 없이 떨리고 기뻤다. 양쪽 눈에 눈물이 한가득 고인 채로 나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수화기 너머 그녀에게, 그리고 이런 행운을 내게 준 누군가에게 거듭 말하고 있었다.


 보통의 사람들처럼 자연스럽고 평범하게 임신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난임 클리닉에서의 1년 여 시간 동안 얻은 것, 배운 것도 많다. 남편과는 더욱 끈끈한 동지가 되었고, 세상에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도 많다는 것을 알았고, 마음을 다스리는 법, 기도하는 법도 배웠다. 좌절하고 상처 받고 힘들었던 만큼 아이가 찾아왔을 때의 기쁨은 더욱 컸다. 수술실 모니터로 처음 내 수정란들을 봤을 때 동글동글 세포 분열된 모습이 마치 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만난 아이들이 벌써 돌쟁이가 되었고, 마침 오늘 한 녀석은 처음으로 걸음마를 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떼는 아이를 보고 '꺅꺅' 소리가 참을 수 없이 터져 나왔다. 마치 처음 임신 사실을 확인한 그 순간처럼 말이다.          

난임 클리닉에서 생긴 일 중 가장 큰 일은 당연히 임신. 이를 위해 얼마나 낯선 과정을 거쳐야 했던가. 그날 남편이 들고 온 꽃을 보니 문득 꽃같다 느꼈던 내 수정란들이 떠올랐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