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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옛골소년 Jun 22. 2020

교우관계로 힘들어하는 아들을 보며

 퇴근 후 늦은 시간 일정하게 찾아오는 배고픔은 근심거리다. 포만감이 목적이 아니라 배고픔만 해결하면 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시골에서 보내 준 야채로 부침개를 준비한 아내는 막걸리도 한잔 건넨다. 위의 부담을 줄인다고 소화제 삼아 마시는 막걸리는 하루 종일 조여져 있던 온몸의 나사를 동시에 풀리게 한다.

 밤참의 만족은 포만감과 함께 의식을 잃는 잠으로 곧장 이어진다. 시동을 걸어둔 채 공회전을 시키는 것처럼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장기들은 나의 욕심으로 들이킨 음식을 소화시키기 위해 밤새 식지 않고 열심히 움직인다. 밤참은 속 쓰림으로 괴롭히거나 숙면을 방해하여 불쾌감을 가져오는데, 알면서도 참으로 헤어나기 어려운 유혹이다.

 밤참처럼 아들에게도 헤어나기 어려운 기억이 반복되고 있었다. 몇 년 전 같은 반 친구의 오해로 붉어진 사건이 있었다. 잊을만하면 반복되는 것을 보면 무엇인가에 허기져 있다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부침개를 준비한 엄마의 호출에도 아들내미는 연거푸 '잠깐만'이라는 말만 할 뿐, 핸드폰으로 계속해서 문자를 주고받고 있었다.

 한참 후 아들내미는 굳은 얼굴로 식탁에 털썩 앉으며, '지금도 사람 관계가 이렇게 힘든데 앞으로 어떻게 해', '뭐, 살다 보면 어떻게 되겠지', 몇 마디 안되는 말에 문제와 답을 한꺼번에 쏟아 내는 듯했다. 관계에 대한 경험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부모의 경험치를 아이들에게 이롭게 전달하는 단어의 선택, 대화의 기술에 한계를 느낄 때가 있다.

 처음엔 세 명이서 잘 어울려 지내다가 한 명과 소원해지는 사이가 되었고, 화해를 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응어리가 두 사람 사이에 있는 모양이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각자 다른 학교로 진학을 했고 아들내미는 오해가 있었던 친구와 자연스레 멀어졌지만, 다른 두 명은 가끔씩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로 지내고 있었다.

 나름 중립을 지킨다는 친구와 오해로 사이가 멀어진 친구, 그리고 아들내미가 있었다. 모호한 삼각관계다. 관계 개선에 허기진 아들과 지나간 과거를 들춰내 추억인 양 얘기하면서 아픈 곳을 다시 건드리는 친구, 중립적인 자세를 취하며 서로의 입장을 전달하는 친구, 비대면 온라인 게임처럼 문자로 설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몸은 성인처럼 커졌지만 생각은 여전히 설익은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이럴 때가 가장 위험하고 힘든 시기이다. 힘은 어른만큼 세졌고 입에서 나오는 단어는 거칠어졌다. 반면에 생각은 강한척하지만 아직 힘없이 약했다. 어린 시절에는 장난감을 뺏고 뺏기거나 다툼이 오고 가더라도 어른이라는 중재자에 의해 빠르게 상황이 정리되었다.

 화해의 부속 감정처럼 따라다니는 설움으로 울음이 터지며 마음이 정리된다. 청소년기를 겪으며 부모의 눈을 피해 조금 더 복잡한 감정 놀이가 시작된다. 설익은 관계의 시작으로 파생되는 설움으로 이제는 아이처럼 쉽게 대놓고 울지도 못한다. 대신에 조용한 사적 공간을 찾아 눈물을 보이지 않더라도 쏟아지는 감정에 허우적대며 자신만의 조용한 시간을 점점 더 가지게 된다.

 실제로 아들은 화장실을 그런 공간으로 사용했고 지금도 잘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복잡한 사회관계로 힘들어하던 시절 샤워를 하며 땀과 울분을 씻어내린 나만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화장실이라는 공간은 생리적 현상을 해결하는 용도와 더불어 감정을 추스를 수 있는 아주 가깝고 중요한 공통의 사적 공간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단지 냄새나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도 있었지만, 전 직장 회사 사장이 유독 화장실 청결상태와 환경에 신경을 쓴 게 그런 이유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너무 깨끗한 나머지 다른 층에 있는 타 회사 직원들까지 원정 오는 부작용도 있었지만, 긴장을 하거나 근심거리가 있을 때 벽에 붙어 있는 한 줄 글 귀와 풍경이 그려진 유화를 보며 위안을 삼는 장소로 꽤 괜찮았던 기억이다.

 총무팀 직원으로서 주기적으로 교체해야 되는, 마음의 양식이 되어줄 만한 한 줄 문구를 찾는 일로, 오히려 내 마음이 수양이 되었던 기억도 있다. 눈 뜨면 제일 먼저 가는 곳이고 자기 전에 마지막으로 가는 곳이니 집에서 제일 깨끗해야 되는 곳이다. 지금은 아이들의 해우소로도 이용된다고 하니 청결상태에 신경을 더 써야겠다는 생각이다.

 잠시 후 아들이 굳은 표정으로 얘기를 끄집어 내며 감정의 정리를 시작한다. 이때 부모의 역할은 단지 청취자일 뿐이다. 정 입이 근질근질하면 댓글은 짧고 굵게, 판단은 스스로 하게 하는 것으로 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오래전 일이고 함께 겪어야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기는 참으로 어렵고 힘든 과정이다.

 아무리 설명을 잘한다고 하더라도 듣는 이의 공감을 얻어내기도 쉽지 않다. 설령 공감을 얻어낸다 하더라도 당사자와 풀어야 되는 이유로 남아있는 감정의 앙금이 말끔히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관계에 의한 감정 놀이에서 지금의 복잡한 감정을 설명하기 위해 스스로 적절한 단어를 조합하는 과정이다.

 주의할 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에 휩쓸려 자기의 감정만 합리화 시키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앞에 있는 엄마, 아빠는 아들의 말만 듣고 조언과 격려를 해주지만 다소 과대포장된 감정의 보따리를 푸는 행동들로 스스로 얼굴이 화끈거리고 후회가 될 때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공부보다 더 중요한 연습이고 학습이다.

 자기감정에 너무 지나치게 몰입하면 없는 사람 하나쯤은 아주 쉽게 날려버릴 수도 있다. 마음에서 한 사람을 지우기 위해 제삼자에게 자세한 부연 설명을 할 필요는 없다. 그냥 나와 맞지 않으면 과감히 아웃시키면 된다. 관계 개선을 위한 허기짐을 채우기 위해서, 사건과 행동을 위주로 얘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부의 행동이 그 사람의 전부인양 함부로 얘기하는 것은 지극히 조심해야 된다.

 사람이 사람에게 느끼는 감정은 주관적인 것이라서 전달하는 한계에서 오는 오류로 인한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다. 청소년기를 거쳐 성년이 되는 시기까지 친구로 알게 된 관계 놀이가 계속 반복되면서, 감정을 다스리는 능력 또한 몸집과 같이 커져갈 것으로 본다.

 지금까지 살면서 겪은 몇 안 되는 교우관계와 다양한 감정들과 싸움은 세월의 긴 다리를 건너는 여정의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 아들은 말로 쏟아낸 감정을 그날의 일기로 마무리했다. 일단 상당한 감정의 정리가 된 것으로 보인다. 정리는 남이 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의 몫이다.

#친구 #관계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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