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으로 집에 오시는 과외선생님

by 옛골소년

퇴근하고 들어온 집이 조용합니다. 딸아이의 방과 아들내미의 방이 모두 닫혀있습니다. 서로 다투었나 싶어 아들의 방을 조심스레 열어봅니다. 아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EDM 작곡에 빠져 있습니다. 동생은 뭐 하냐고 물어보니 전화 통화로 영어 과외를 받는다고 합니다. 평소 같으면 선생님이 집으로 와서 얼굴을 마주하며 받았을 수업을 코로나19때문에 전화 통화로 받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목소리만 손님이 되어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가족이 아닌 타인이 집에 오는 것이 때로는 부담입니다. 깨끗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만 좁은 공간에 쌓여만 가는 짐은 버려도 다시 먼지처럼 쌓이고 강아지를 키우지 않은데도 방바닥에 보이는 머리카락은 강아지 털처럼 이리저리 나뒹굽니다. 딸아이의 영어 과외 선생님은 1년 넘게 우리 집을 방문하는 유일한 타인이자 정기적인 손님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오시는 전날은 우리 집 환경미화의 날입니다.

주기적인 집 청소를 하게 해주는 고마운 분입니다. 맨날 물만 드릴 수 없으니 가끔은 음료도 준비하고 그리고 과일과 식사도 대접하고 아이를 맡겨놓은 부모의 입장에선 단순히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님 이상의 존재입니다. 딸아이의 말동무가 되어 주기도 하고 집이 아닌 곳에서 과외를 하는 날이면 카페의 달콤한 음료도 맛볼 수 있는 신세계도 경험하게 해주시니까요.

처음엔 불편했을 텐데 어느덧 익숙한 공부 파트너가 되었고 수업 중에 걸려오는 선생님의 전화 통화로 일부 사생활이 노출되더라도 둘만의 비밀처럼 웃어넘기며 방 안에서 느끼는 오붓함은 가족과 또 다른 대인 적응 경험치를 키우게 해줍니다. 좁은 방안의 세계에서 공부이외에 고민 상담도 있을 것이고 대학생활의 낭만도 듣게 될 것이고 선생님의 남자친구 얘기도 들을것이고?ㅎㅎ

제가 경험해 보지 못한 경험을 하는 딸아이가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학창시절로 다시 돌아가 딸아이처럼 단독 과외를 받았다 하더라도 인생이 크게 바뀌지 않았을 것입니다. 학창시설 내내 공부가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니까요!ㅋㅋ, 그러고 보면 학창시설 동안 선생님과 5분 이상의 독대를 해본 경험이 없는 것 같습니다. 내성적이고 성적도 눈에 띄지 않았고 여느 아이들처럼 고만고만한 학창시절을 보낸 탓이었을까...

대화는 커녕 학창시절 선생님에 대한 별다른 기억조차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 당시엔 선생님이라는 단어가 주는 거리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학급 인원수가 너무 많아서 그랬을까요..., 선생님이라는 단어는 그만큼 어렵고 무서운 존재였습니다. 고향 옆집 아재의 직업이 한때는 선생님이었다는 이유로 퇴직하신 지가 오래되었지만 아직까지도 만나면 선생님으로 보이는 불편한 거리감이 있는 듯합니다.

당시에는 대학생 과외 선생님의 과외교육을 받는 것이 부잣집에서나 가능했던 일이고 TV드라마에서나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손만 뻗으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넘쳐나고 상당 부분의 사교육비 부담은 당연한 것처럼 생활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학원 선생님의 숙제와 말이 아이들의 교육에 더 큰 영향을 줄 정도로 영향력도 커졌습니다.

아이들을 경쟁에만 몰아가는 교육열풍으로 사교육에 맹목적으로 쫓아가기 교육 환경이 학교 선생님에 대한 의미를 예전만큼 어렵고 무섭고 절대적인 존재에서 그냥 옆집 아저씨처럼 만들어 버린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합니다. 잠시 학교 선생님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담임선생님의 가정방문에 대한 예전의 기억을 소환해 봅니다.

넉넉지 않은 형편과 초라하기까지 한 삶의 공간이 노출되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당시에 가정방문 담임선생님을 맞이하는 공간은 외양간과 벽을 하나 둔 방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 사이에 작은 창고 하나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아무튼 방에서 들리는 소 울음소리는 스테레오 사운드였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그랬을까요!..., 집으로 가정방문이라도 오시는 날이면 그냥 불편, 불안, 부끄럼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방문을 걸어 잠근 채 아버지랑 하시는 대화가 몹시 궁금했지만 아버지나 선생님은 방에서 오고 갔던 일체의 얘기를 단 한 번도 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아이는 학교생활을 잘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고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시는 데 집중하시라..., 부족한 아이를 이끌어 주시니 선생님만 믿고 먹고 살아가는 것에 그저 감사한 마음이다"라는 말이 오고 갔을 것으로 추정해 봅니다.

부모님은 선생님을 믿었고, 그렇게 아이를 맡겼고, 그리고 선생님은 부모님의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 아이의 머리 와 꿈을 채워갔고, 아이는 오롯이 선생님에게 기대어 스스로 공부하고 친구와 다투고 화해하며 사회관계를 배워갔습니다. 학교에서 발생되는 친구들과의 다툼은 학교 안에서 해결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중재자 역할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중재자 역할과 부모의 소극적 방관자 역할은 학교와 아이를 연결해 주는 고리가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부모의 역할은 아이를 깨워서 학교에 보내고 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선생님 의존형 방관자가 아니었을까!..., 당장 먹고사는 문제가 코앞에 닥쳐 있었으니..., 학교에서 받아오는 큰형의 성적표를 보며 또 다른 배고픔을 채우며 살아가셨던 부모님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큰형은 스스로 공부를 잘하는 아들이었습니다.

아이들의 학교 담임선생님은 이제 가정방문이라는 것을 하지 않습니다. 부모들의 먹고살 만한 문제가 해결되었고, 부모들의 방관자 역할은 적극적 개입자로 변했고, 결국은 선을 넘어 선생님의 고유영역까지 침범하여 범위를 넓혀 갔습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여러 가지 복잡한 사유로 폐지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아마 제일 큰 부작용은 방문을 닫은 공간에서 은밀하게 이뤄지는 자식의 뒷담화가 아니었을까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봅니다.ㅋㅋㅋ

그리고 어떤 제도이던 본래 취지의 선한 영향력 이외에 그렇지 않은 부작용이 따르게 마련인 것 같습니다.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는 순간부터 부작용은 시작됩니다. 자기의 역할에 충실하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은 오지랖이 넓어진 세상이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남의 영역에 들락날락해도 아무렇지도 않은 당연한 세상이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가끔씩 아이의 과외 선생님이 오실 때면 그때의 순수했던 아버지가 생각납니다. 장소와 시간만 다를 뿐 대화를 엿듣던 호기심 많던 아이에서 어느듯 선생님과 아이의 엿듣고 싶은 적극적 개입자 아빠로 변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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