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함의 의미

by 옛골소년

저녁식사를 마치고 TV를 같이 보고 있던 아내가 명함을 새로 인쇄를 해야 하는데 직함을 무엇으로 정하면 좋을지 물어보았습니다. 아내의 직업은 프리랜서에 가깝습니다. 사무실에 소속을 두고 있지만 성과에 따라 급여가 정해집니다. 명함으로 광고를 하고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명함을 건네주어야 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직함은 실장입니다. 보통 20대에 직장에 들어가 실장이라는 직함을 가졌다면 그 사람의 연륜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자리에 있음을 말해 줍니다. 누구든지 갈 수 있는 자리지만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직함입니다. 아내는 서열이 엄격한 직장에서는 가질 수 없는 계급장과 같은 직함을 스스로 명함에 인쇄할 수 있는 것도 기회라면 누려야 한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름 앞에 인쇄된 직함은 이름보다 고귀한 세상이라는 것을 퇴직한 이후로는 잊고 살았습니다.

직장에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사람이라면 직함이나 직위는 이름과 같았습니다. 경쟁으로 꽃피운 상승 욕구의 보상이자 계급장이었습니다. 그때는 관공서에서 이름만 달랑 불리는 민원인의 지위가 왠지 어색하고 낮춰 불리는 듯한 묘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이 이름을 부르는 게 당연했지만 직장 밖에서 이름만 달랑 불렸던 직함의 일시적 상실감에 마음 한구석이 빈듯했었습니다.

명함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면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명함의 직함에 따라 허리와 머리의 각도가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직함이 낮은 사람일수록 접대성 웃음을 많이 짓는 것 같았습니다. 서열이 중요한 곳에서는 당연한 광경일 것입니다. 그래서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은 욕구는 커졌을 것입니다. 한동안 위에서 내려다보는 쾌감을 즐겼습니다.

하지만, 번듯한 직함을 달고 있다 해서 마냥 좋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고귀하고 상징적인 직함이나 직위 앞에 "야!"라는 단어가 붙는 날이면 뭔가 잘못을 한 것이었고, "야!, ○○○"라며 이름이 날 것으로 불리는 날은 뭔가 크게 잘못한 것이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부모님이 고이 붙여주신 이름이 그대로 불리는 게 왜 그리 기분이 나빴었던지!...,

불리하지도 않은 상황에서도 직함이 높은 사람의 명함을 받을 때면 앞으로 나를 이렇게 대우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강요였고 일처리에 대한 무언의 협박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명함은 그냥 상대방을 누르는 힘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그런 상황과 목적의 명함이 아니었기에 친근감(?)을 주는 지금 직함도 충분히 괜찮을 것 같아 그냥 그대로 사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전했습니다. 같이 일하는 다른 직원들의 직함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남자들은 모두 "이사"이상의 직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그냥 작아진다니까...

경험치를 나타내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만족을 위하는 목적이 더 큰 것 같았습니다. 셀프 상승 욕구의 과시도 있을 것입니다. 직장시절 임원방에 들어가 연신 허리와 머리를 조아리며 어쩔 줄 몰라 했던 기억 때문이었을까 "이사"이상의 직함은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실장이라는 직함도 그리 가까이하기가 쉽지 않은 호칭이지만 그래도 그렇게 불편했던 "임원"을 집에 가까이 두고 살기에는 상당한 부담이라고 생각했습니다.ㅎㅎ

명함은 정체성의 상징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현직에 있던 은퇴를 하던 명함이 주는 힘은 중년 남자들의 제2의 삶을 위한 흔들리는 정체성의 혼란을 잡아주는 하나의 수단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 맘껏 달아보고 싶은 마음이 한편으로는 충분히 이해가 되었습니다. 누구든 기회가 있지만 아무나 달 수 없던 임원의 꿈을 스스로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타인의 관심을 먹고 살아갑니다. 퇴직을 하면서 번듯한 명함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상실감은 오래갔습니다. 하지만 오래갈 것 같았던 나의 직장 생활 계급은 하룻밤의 꿈과 같이 어느 순간 멈춰버렸습니다. 계급에 목말랐지만 줄지어지는 것이 몸서리치게 싫었고, 민낯의 이름이 불리던 부끄러웠던 그날들을 지워버리며, 이름이 불리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지금에서야, 20여 년이 지나서야, 부끄럽지 않았던 이름을 다시 되찾았습니다.

아내에게 지금 하는 일이 과거에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러하듯 고객에게 전해지는 명함은 단지 메모지라고 했습니다. 명함에 드러나지 않은 진실된 말과 행동이 더 오래 기억될 것이고 비로소 명함에는 주는 이의 특징이 기록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친근감이 가든 그렇지 않든 명함으로 사람을 다 보여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명함으로 단지 인사를 건네는 것일 뿐이고 사람은 말과 행동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얘기해 주었습니다.

#명함 #직함 #상승욕구 #의미 #커피인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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