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손님의 무용담

by 옛골소년

칠순이 넘어 보이는 할아버지 손님이 카페에 오셨습니다. 귀한 동반자라도 되듯 타고 오신 자전거를 최대한 가깝고 잘 보이는 곳에 고이 주차를 하시고는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십니다. 검은색 항공 점퍼에 군복처럼 생긴 검은색 바지를 입으셨고 검은색 워커를 신고 얼마 남지 않은 머리숱을 가지런히 빚어 넘긴 검은 머리에서 한때는 오토바이로 스피드감을 즐겨셨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치 검은색이 젊음을 상징하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올블랙의 코디가 유난히 멋스럽게 보였습니다.

멋들어진 굵고 깊은 목소리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하시고는 자리에 앉으십니다. 나도 저렇게 멋있게 늙어 갔으면 하는 동경으로 커피를 내립니다. 하지만, 멋있게 늙어가는 것이 외모만이 아니라 다른 것도 뒷받침되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초면의 할아버지 손님과 커피 한 잔을 함께 한자리가 끝난 후에서야 새삼 느꼈습니다.

근처에서 작은 식당을 하시는 분이셨고 손님이 너무 없으니 자전거로 주변 상황은 어떤지 둘러보러 나오셨다가 저와 커피 한 잔을 같이 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위가 없어짐으로 인해 밥장사가 안되어 힘들어하시는 분과 시위가 없어야 장사가 잘 되는 서로 반대의 입장을 가진 이웃끼리 커피 한 잔의 어색한 자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서로 다른 입장의 차이는 30년이 넘도록 장사를 하신 분과 이제 막 요식업에 뛰어든 저와의 격차를 말해 주는 것만 같았습니다.

저의 부모님 세대에서 지독한 가난을 이겨내기 위한 몸부림으로 만들어 냈던 기회가 내가 누렸고 누리고 있는 기회로 전달되었지만 청소년인 현재의 아이들에게 돌아가는 기회의 크기는 오히려 점점 작아지는 듯하다는 나의 넋두리로 시작되었던 이야기가 한 시간 반이라는 시간이 참 길고도 힘든 시간으로 느리게 흘러갔습니다.

기회의 축소를 처음 보는 요식업계의 대선배에게 해답을 원하는 건 아니었지만 조금의 공감이라도 얻고 싶었던 게 너무 무리한 요구였을까!...할아버지 손님이 쏟아 낸 밥집으로 시작한 사업이 부동산 투자로 꽃을 피웠다는 그 시절의 무용담 같은 얘기는 현실의 나와는 괴리감이 큰 이야기들로 가득했고 30년 전이니까 가능했을 거라는 삐딱한 시선에서 바라보는 생각으로 한 시간 반이라는 시간은 불편함으로 가득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시겠어요?...,라는 질문을 마음속으로 던저봅니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삶이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 같았던 얘기는 그 많던 재산을 다 정리하게 되었다는 잘나가던 한때의 그리움에 대한 넋두리로 끝이 나버렸지만 할아버지의 끝나지 않은 생존기는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은 확실해 보였습니다. 현재 이분이 가지고 있는 작은 설렁탕집과 나의 카페를 동일선상으로 하고 앞으로 나에게 남은 30년이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위로 아닌 듯한 위로의 말씀과 함께 다시 과거로 거슬러 갈 수만 있다면 그때처럼 부의 축적에만 휘둘리는 삶을 살지 않았을 거라는 미련의 말이 흘러나왔습니다.

냉탕을 경험하신 것까지 드러내기에는 초면의 카페 주인장에게 털어놓기 싫은 숨기고픈 비밀이 있는 듯해 보였고 조금만 더 물어보면 그 실패의 궁금증이 풀릴 것 같았지만 이미 지난 낡아빠진 얘기인 듯 잠시 머뭇하시고는 딴 생각 하지 말고 열심히 하면 좋은 일이 올 거라는 말을 하시고 자리를 정리하십니다.

현재 가진 것만 비교했을 때 30년의 격차가 좁아진 것 같지만 이게 무슨 비교 의미가 있을까 하는 바보 같은 생각에 머리를 흔들어 봅니다. 확실한 건 현재의 할아버지와 나의 희망은 같았습니다. 소박하게 먹고 살 정도로만 예전같이 손님이 와 주었으면 하는 바램.

커피 한 잔을 비우고 돌아가시는 할아버지를 마중해 드리며 자전거에 걸리 BMW 로고가 선명한 자물쇠를 보며 할아버지는 자전거가 아니라 스포츠카를 타고 오신 거였구나!라고 드러내지 않은 웃음을 지어 봅니다. 그만 과거에 갇혀 지내지 마시고 현재로 탈출하세요!...,

그리고 이왕이면 시위단체의 손님이 아니라 먹고살기 위해 뛰어다니는 소박한 삶의 사람들로 다시 당신의 식당과 저의 카페가 채워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다음에 또 들린다는 말씀을 하시고 자전거와 함께 유유히 사라지는 뒷모습이 올 때와는 또 다른 멋진 모습으로 보입니다. 멋있게 늙어가는 것은 끊임없이 삶과 싸울 힘과 열정을 유지하고 가야 되는 것을 느끼게 해준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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