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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옛골소년 Apr 23. 2020

광화문 서점에서 산책하기

퇴사 이후의 정체성 찾기

얼마 만의 바깥 외출인가, 강아지처럼, 아이처럼 기분이 좋았다. 오랜만의 약속에 마음이 이렇게 들뜨다니, 아내의 일 때문에 알게 된 부부와 맥주를 한잔하기 위해 카페 문을 닫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조심스레 광화문으로 향했다.

약속 장소까지는 20여 분이면 도착하지만, 카페에 있는 시간이 답답했던 터라 약속시간까지 충분한 시간을 두고 일찍 가게를 나섰다. 오랜만의 외출이니 광화문에 있는 교보문고에 들러서 서점에서 산책을 즐기기로 했다. 서점에 가는 길이 이렇게 행복할 줄이야. 마을버스에서 내려 뛰어가듯 교보문고 안으로 들어갔다.

모르는 사람들이 그냥 반가웠다. 그리고, 옆으로 가서 무슨 책을 보고 있는지 기웃거리며 힐끔힐끔 얼굴을 쳐다보았다. 회사를 그만두고 목표로 했던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채우기 위해 블로그를 시작했다. 그래서 전에 접하지 않았던 책에도 관심이 생겼다. 책 읽는 무리 옆에 가서 책을 하나 집어 들고는 잠시 읽어 내려갔다.

목적을 정하지 않고 와서 그런지, 그냥 집히는 책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어느새 책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책 읽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소속감이 없는 정체성의 상실감 때문이었을까, 교보문고는 예나 지금이나 같은 장소였지만 회사 안에 있을 때와 회사밖에 있을 때의 느낌이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주위는 산만했고 옆 사람을 많이 의식하는 편이라 책 보는 흉내 내기는 금세 집중력 결핍증이 나타나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렇게 뚜렷한 목적을 정하지 않은 서점 방문은 집히는 책에서 공감이 되는 글귀를 찾는 데에만 집중하다 보니 금세 흥미를 잃어 책을 내려놓게 되었다. 목적을 정하지 않으면 흥미를 잃는다. 그래서, 지나친 감정의 가라앉음을 방지하기 위해, 흥미를 잃지 않기 위해, 목적을 정하지 않았다. 교보문고에 산책을 하러 왔으니 다른 목적은 필요 없었다.

인왕산 둘레길을 산책하듯 책은 그저 피어있는 꽃과 식물로 보면 되고 쌓여있는 책들로 이루어진 숲을 보며 길을 걸어가면 된다. 숲에 가는 이유는 식물과 나무의 이름을 알지 못해도 숲이 주는 정화되는 듯한 기운을 받으러 간다. 책은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가득하다. 그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감정을 드러내듯 관심을 끌기 위해 꽃처럼 진열되어 있었다. 산책을 통해 이 많은 책들 중에 나와 맞는 책을 찾아야 하고 조금씩 친해지면 된다.

최근까지는 회사의 업무와 관련된 책들을 많이 샀다. 그렇게 누군가에 의해 정해진, 목적이 뚜렷한 방문을 할 때면, 먼저 사고 싶은 책을 정하고, 검색을 해서 위치를 찾고, 손에 넣기 바쁘게 계산대로 향하고, 빨리 빠져나오기에 급급했었다. 야생에서 먹잇감을 획득하고 나만의 사적인 공간으로 가져가 부위별로 유유자적하게 뜯어먹듯 책은 조용한 곳에서 방해 없이 집중해서 읽어야 내 것이 되었다. 지금껏 그런 과정에 익숙했고 독립된 공간을 즐겼다. 지금까지는 누군가가 던져 놓은 사냥감을 쉽고 빨리 잡기 위한 책들을 수집했다.

일과 관련된 서적들은 목표물을 쉽게 쫓고 손에 빨리 넣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내용의 감동 따위는 필요 없이 빠르고 쉽게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내용들로 가득했다. 회사를 다니는 한동안 리더십과 노무관계에 대한 내용의 책에 몰입했다. 조직에서 리더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되는 순간, 배려의 리더십은 쓰레기통에 던져버려야 했고, 조직에는 회사의 이익을 위한 리더만 남아야 된다는 것을 알고나서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

그렇게 조직이 정해 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지칠 줄 모르고 사냥개처럼 달리던 질주는 멈췄다. 그 순간 까마득한 후배가 선물해 준 "자존감 수업"이라는 책을 한 권 손에 쥐고 있었다. "자존감, 지금 시작해도 늦지 않다". 그리고, 책의 첫 장에 적혀진 "팀장님!, 지금부터라도 자존감을 끌어올리세요"라는 후배의 글씨는 뒤통수를 때리는 듯한 묵직함으로 느껴졌다.

얼마 만인가, 교보문고 방문 목적은 조직과 관련된 사냥법이 적혀있는 책을 찾는 것이 아니고 숲의 기운을 즐기기 위한 산책이었다. 가라앉은 정체성을 끌어올리고 새로운 것에 흥미를 갖기 위해 애초의 교보문고를 들린 목적을 상기시켰다. 나를 위해 손에 잡히는 책이 있으면 꽃을 보는 마음으로 내 것으로 가져가야지, 내가 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숲을 거닐다가 꽃을 얻어야지. 모든 것이 눈에 들어오는 산책의 여유로움으로 이제는 익숙하지 않은 것에 눈을 떠야 한다.

교보문고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꽃들이 가득했다. 이제는 이름이라도 알아두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그것 중에 내 삶에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 꽃이 있을 수 있다. 나와 익숙했던 것을 잠시 멀리하고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것에 눈을 돌려볼 때가 되었다. 오롯이 나와 관련된 일로 인해 느끼지는 성취감과 우울감이 그전 것과 어떻게 다른지 경험해 보고 싶다. 그래서, 그동안 사지 못했던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의 얘기가 적혀있는 책을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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