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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옛골소년 Apr 24. 2020

아내의 등 밀어주기

아내의 일로 만나게 된 부부와 경복궁역 근처에서 만나 맥주를 한잔했습니다. 연배는 좀 더 있었지만 친구처럼 자연스럽게 대화는 이어졌습니다.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바로 말을 놓고 지내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후자가 좋습니다. 말을 높이는 것이 오히려 말실수를 줄이는 효과가 있다고 봅니다.

경험상 나이가 많아도 말을 높여주는 사람에 대한 거부감이 적었습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아내와 이견이 있는 화젯거리가 나왔습니다. 부부는 아내와 일적으로 아주 오래전 알게 된 사이입니다. 아내의 일적인 면과 가정적인 면이 다르다는 것을 잠시 있고 아내를 무시하듯, 평가절하하는 말이 나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왔습니다.

자리를 함께한 부부는 일적으로는 나보다 더 많이 아내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마주하고 있는 부부의 남편 되는 분이 "아직도 아내에 대해 모르는 게 있는 것 같습니다"라는 말에 잠시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말의 진짜 의미는 뒤로한 채, 맘속으로 부부라고 속마음까지 속속들이 알 수가 있나, 그리고 알 필요가 있을까라는 설익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아내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한 것은 아내를 너무 과소평가한다는 의미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거래 관계가 아닌 사람이니까 단지 친한 옆집 이웃처럼 대하는 나의 자세와, 고객의 입장에서 만나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아내의 자세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나서야 아내의 말과 행동을 자세히 보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아내를 집사람쯤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부부를 만나는 것이 사적인 만남인 것과 동시에 비즈니스적인 만남이었다는 것을 취기로 인해 잠시 잊었습니다.

아내는 집과 밖의 모습이 달랐습니다. 그날 만난 부부의 눈에는 아내의 집 밖의 모습만 보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부부는 아내를 칭찬하고 있었고, 반면에 나는 아내를 평가절하하고 있었습니다. 지나친 겸손의 자세에서 나온 무의미함이라는 생각으로 다시 아내의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짐했습니다. 누군가가 아내를 치켜세울 때 나도 비행기를 태워주어야겠다고. 오히려 끌어내리고 있었으니..., 이런, 한심한 노릇이 있나..., 마치 축구경기에서 자살골을 넣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경복궁역 통닭집의 맥주 한 잔에 대한 기억이 오래갈 것 같습니다. 장소의 기억은 누구를 만나 어떤 얘기를 나누고 무엇을 느꼈는지에 따라 추억이라는 공간에 저장되었습니다. 추억은 기억과 달리 저장되는 장소의 깊이가 달랐습니다. 그렇게 기억으로 끝날 것 같았던 곳이 추억에 남는 장소가 되어 경복궁역에서 추가되었습니다.

만남을 끝내고 나온 경복궁역은 바람이 많이 불어 밤공기가 차가웠습니다. 그리고, "손발이 그렇게 안 맞아서 어떡하니"라는 아니의 말에 밤공기가 더 차갑게만 느껴졌습니다. 멋쩍은 웃음과 함께, 찬바람만 아니었다면 경복궁역에서 집까지 오랜만에 데이트를 즐길 수 있었을 텐데...,라는 미안한 생각이 바람과 같이 스쳤습니다. 그런데, 아내와 같이 누군가를 만나서 맥주 한 잔을 해본 기억이 가물가물..., (있기나 했었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넌, 도대체 지금껏 누구랑 그렇게 술을 처먹어댔니?, 그리고, 그 사람들도 면전에 대고 그렇게 깎아 내렸었니, 그 사람들은 널 기억이나 하고 있니",ㅠㅠ. 그러고 보니 다들 어디에 있을까..., 옆에는 아내가 있었습니다. 지금부턴 아내가 술친구이자 동업자입니다. 이제부터는 같은 편 골대로 공을 차 넣는 실수를 하지 말자고 다짐을 했습니다. 찬 바람을 피해 경복궁역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아무 말 없이 집으로 향했습니다. "아, 가시질 않는 미안함..."

집에 들어가는 길에 편의점을 들러 컵라면을 샀습니다. 술을 그리 많이 마시지는 않았지만 술을 먹고 나면 마지막에 라면 국물로 해장하는듯한 짜릿함을 기억하는 좋지 않은 버릇이 있습니다. 나쁜 버릇은 몸에서 잘 떨어지지 않습니다. 취기에서 나오는 쓸데없는 술 버릇의 잔재는 아내를 편들어주지 못한 것과 함게 버려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집에 도착 후 컵라면을 준비했습니다. 아내는 샤워를 하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습니다. 물이 끓고 컵라면이 익기를 기다리던 중 화장실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등 밀어 줄 사람!", 그리곤 아들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날 맥주를 같이 한 부부가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고2가 된 다큰 아들이 엄마의 등을 밀어 준다는 사실을...

아들의 엄마 등밀어 주기는 사춘기를 기점으로 멀어질 수도 있었던 모자관계에 대한 지속적인 연습과 반복의 결과물입니다. 아내는, 가족은 서로의 등을 밀어주는 관계이지 등을 떠미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딸도 있고 남편도 있는데 아들에게 받는 손길이 제일 좋은가 봅니다.

하지만 그날만은 아들을 제치고 아내의 등을 밀어주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갔습니다. 아내는 다소 실망한 얼굴과 함께 "웬일이냐"라며 퉁명스럽게 말을 건넸습니다. "오늘은 같은 편 등밀어 주는 날이야", 비록 컵라면은 불었지만, 미안함은 조금 줄은 듯했습니다. 그렇게 만회골을 넣은 듯한 기분으로 컵라면을 먹으며 기쁨의 세리머니를 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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