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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옛골소년 Apr 25. 2020

봄나물에 전해진 엄마의 손길

부모님이 보내주신 쌀과 봄나물이 도착했다는 전화를 드리면서 서로의 안부를 전했습니다. 한창 같으셨으면 농사 준비로 바쁘실 텐데 연로하신 부모님은 텃밭 정도만 손수 농사를 짓고 큰 일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남에게 맡기셨습니다. 고향에서 전해진 봄나물을 보며 옛기억과 함께 엄마의 손이 그리워집니다.

4월과 5월은 농사 준비가 한창인 시기입니다. 농사일에 일손이 필요할 때면 주말 아침 부모님을 따라 밭으로 향했습니다. 강둑을 유유히 거닐던 나들이객들과 밭에 농사일을 하는 농사꾼 가족의 그림은 대조적이었습니다.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따뜻한 봄날, 부모의 손을 잡고 강둑을 거니는 다른 집 또래아이의 모습이 마냥 부러웠습니다.

모자를 눌러써고 밭에 앉아 있는 아이는 나들이 나온 아이와 눈이라도 마주칠까 고개를 들지 못하고 지나갈 때까지 땅만 바라보았습니다.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였지만 어린아이의 마음엔 농사일을 거들어 주러 나온 모습이 부끄러웠습니다. 코를 찌르는 거름 냄새는 엄마의 머리 위에 피어나는 아지랑이와 함께 코를 지나 눈에서 아른거렸습니다.

쪼그리고 앉은 걸음은 나들이 객들이 수없이 지나쳐 갔던 거리에 비하면 항상 제자리를 맴도는 듯했습니다. 폭신폭신한 흙은 운동화를 비집고 들어가 양말마저 뚫어버린 채 발가락을 간지럽혔습니다. 운동화에 들어간 흙을 털기 위해 일어서는 행동을 수십 번 되풀이해야 힘든 밭일은 끝이 났습니다.

조금씩 철이 들어가며 알게 되었습니다. 나들이 객들이 보는 눈을 의식하며 느꼈던 부끄러움은 부모님의 평생 직업에 대해 자식이 스스로 모독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운동화에 들어간 흙을 털기 위해 일어설 때 느꼈던 빈혈 증상은 철결핍성 빈혈이 아니라 철이 없어서 일어났던 부끄러움의 부작용 같은 것이라는 것을.

철이 없는 결핍으로 나타났던 어지럼증은 나들이객들에게 자주 노출될 수록 점점 사라졌습니다. 몸과 마음이 성장할수록 거드는 농사일의 강도는 점점 세졌습니다. 아버지가 들어 올렸던 포대의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졌고, 동네 품앗이로 모내기를 할 때면 모친이 집에서 이고 온 새참다라이를 내려놓을 때의 무게가 상상 이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둘 수 있었더라면, 인생의 고비에서 한 번씩 꺼내볼 수 있었을 텐데, 부모님이 들고 내렸던 삶의 무게를 사진으로 저장해 두었더라면, 살면서 흔들리는 것에 무게감을 실어 흔들림이 덜하지 않았을까라는 아쉬움 가득한 생각을 해봅니다. 지금의 아이들은 엄마, 아빠의 삶의 무게를 어떤 사진으로 저장하고 있을까.

농사일을 거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저물어 가는 태양을 뒤로하고 달이 교차되는 들녘의 그림을 기억으로만 저장해 두었습니다. 하루가 노을 지는 저녁처럼 아름다움으로 끝날 것 같았지만 모친의 하루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삐 움직이는 손길로 금세 된장찌개와 나물을 저녁식사 메뉴로 밥상에 올려놓았습니다.

봄나물을 투박스럽게 손으로 뜯어 대접에 놓는 모친의 손은 아버지의 손만큼 검고 두터웠습니다. 손톱 밑에 밴 흙 자국은 농사일이 끝날 때까지 지워지지 않는 모친의 매니큐어 색이었습니다. 모친의 손에 의해 비빔밥은 그 흔한 계란 하나 없이 된장과 고추장만으로 완성되어 허기짐을 채웠습니다.

설거지를 끝내고 그제서야 모친의 손과 발은 하루의 무게를 내려놓았습니다. 누워있는 모친의 손을 내 손으로 가져와 손을 맞대어 보았습니다. 봉긋함은 온데간데없고 편편해진 모양의 손톱을 손톱깎이로 동그랗게 만들어 봅니다. 그리고 손톱 밑에 밴 삶의 자국을 잠시 지워보려 안감힘을 써봅니다. 잠시 후, 막내아들의 손에 의해 손톱을 다 깎기도 전에 코를 골며 입으로 거칠 날숨을 몰아치는 것으로 모친의 고된 하루는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그 다음날, 매일 같이 부모님은 들판으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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