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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옛골소년 Apr 27. 2020

딸에게 들려주는 옛날이야기2

딸아이가 색연필을 가지런히 펼쳐놓은채 손으로 연필을 깎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솜씨도 뽐낼 겸 옛 느낌도 살려볼 겸 해서, 딸아이와 마주하고 앉아 거들어 보기로 했습니다. 잠시후, 여러 색으로 떨어지는 연필심의 부스러기로 종이에 그림을 그린 듯 작품이 되었습니다. 뾰족하게 깎여나가는 소리는 아주 오래전 모친의 부엌칼에 의해 연필의 모양이 완성되었던 것과 같은 소리를 내었습니다. 아빠가 예쁘게 깎은 것을 보고 딸아이가 좋아라 했습니다.

아이들이 커가며 연필은 샤프에 밀려났습니다. 자연스레 자동연필깎이도 집에서 자취를 감춘지 오래되었습니다. 자동연필깎이에 익숙한 딸아이에겐 아빠가 깎아주는 모습이 처음이거나 기억에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색연필을 깎는 동안 들려주는 아빠의 어린 시절 얘기는 잊어버리더라도 마주하며 깎아주는 아빠의 모습은 기억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얘기를 시작했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자동연필깎이를 가지고 있는 친구의 집은 부잣집으로 보였습니다. 한동네에 가지고 있는 게 몇집이 되지 않았으니 아이의 눈에는 부의 기준이었습니다. 편리하다는 이유보다는, 집에 있고 없고의 차이가 싸움의 끝판이 되기도 했습니다. 친구와 말다툼에서 단지 우리 집에는 없고 친구 집에는 있다는 것만으로 패배자가 되었던 물건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런 생뚱맞은 패배감의 잔재로 여태 컷 미친 듯이 여러 물건을 사 모았을지도 모릅니다.

모친에게 우리 집에도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조르면 "친구 집에 갈 때 깎아서 오면 되지, 그게 꼭 필요하냐"라고 하시며 부엌칼로 깎아 주셨습니다. '삭삭삭', 나무를 깎고, '슥슥슥', 연필심을 다듬는 소리는 우리 집에서 들리는 소리였고, '드르럭드르럭', 톱니 소리를 내며 금세 갈려서 나오는 자동연필깎이의 소리는 부자인 친구 집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였습니다. 물리적인 기계음을 동경하며 소유욕을 불타오르게 했습니다.

구멍에서 빠져나와 새롭게 태어난 연필의 모양은 감탄을 자아냈습니다. 매끈하고 뾰족하게 깎여 나와 새것처럼 느껴졌고, 상대적으로 칼로 깎은 것은 투박해 보였습니다. 자동연필깎이가 있는 친구 집에 갈 때면 집에 있는 연필을 죄다 가져가서 예쁘게 깎인 모양으로 집으로 가져와 모친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사달라는 무언의 압박이었습니다. 상대적 가난함을 느낀 아이는 그것 하나만 있으면 더 이상 세상 부러울 것 없다는 상대적 행복을 꿈꿨습니다.

무언의 압박으로 행복을 꿈꿨던 만큼, 모친은 점점 자동연필깎이와 경쟁이라도 하시듯, 최대한 빠르고 이쁘게 깎아주어야 아들의 미련을 떨쳐 버릴 수 있다고 믿으셨던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한참 흐른 뒤, 부모님이 사주신 것인지 용돈을 모아 샀는지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그 작은 물건 하나로 부자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친구와의 비교에 의한 상대적 행복감을 만끽했던 순간이었습니다.

현재의 물질적인 풍요로움으로 아빠의 어릴적 경험은 아이들에겐 낯선 광경일 것입니다. 할머니가 부엌칼로 연필을 깎아 주셨고, 심지어 할아버지는 농기구인 낫으로 깎아 주셨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더니 눈이 똥그래졌습니다. 지금은 집에 당연히 있는 물건들이 한때 아빠의 눈에는, 부의 상징이었던 물건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었기에, 지루하지 않게 하기 위해, 아이들에게 아빠의 어린 시절 얘기는 최대한 재미있게 전달되어야 했습니다.

한동네에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그 시절은 가난이라는 표현이 그리 낯설지 않았고 익숙하기까지 했습니다. 다들 고만고만하게 살았기 때문에 가난했지만 가난하다는 생각을 할 여유도 없이 그저 먹고살기에 바빴던 때였습니다. 물질적으로 비교하거나 상대될 만한 것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작지만 함께 할 수 있는 집과 가족들이 삶의 위안이 되었고, 소유의 비교우위 대상이 아니었던 자연을 놀이터 삼아 놀 수 있었던 것만으로 절대적 행복감을 느끼며 살았을 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웬만한 것은 집에 다 갖추고 사는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살림살이가 넉넉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동연필깎이와 같은 있고 없고의 비교 대상을 계속 찾게 되는 환경에 놓여있습니다. 예전에 모친과 마주한 모습을 생각하며, 지금은 자동연필깎이가 없으니, 딸아이와 연필을 잡고 마주 앉을 기회도 생겼고, 부엌칼로 연필을 깎아 주었던 모친의 마음을 그려보았습니다. 아직도, "그게 꼭 필요하니"라는 얘기가 귀에 맴도는 듯 했습니다. 그리고, 다짐해 보았습니다. 아이들에게 상대적 행복감에 취해 생각의 가난함을 물려주는 실수는 범하지 말아야지, 절대적 행복의 요건은 비교하거나 상대될 만한 환경과 조건에 흔들림없는 생각에서 느끼는 행복감이라는 것을 알려주어야지.

#모친 #딸아이 #연필 #자동연필깎이 #행복감 #커피인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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