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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옛골소년 Apr 29. 2020

대책없는 삶

매일 아침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눈에 익숙한 옷을 입습니다. 어제와 같은 밥과 어제와 같은 커피, 어제와 같은 신발을 신고 하루를 시작합니다. 매일 같은 커피를 마십니다. 건강에 좋지 않으니 인스턴트커피는 마시지 말라는, 일정한 주기로 들려오는 아내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은지 한참 되었습니다. 굳이 대책을 세우지 않아도 되는 그토록 꿈꿨던, 밥과 좋아하는 커피 한 잔을 즐길 수 있는 대책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뭐든지 과하면 문제지, 인스턴트 모닝커피 한 잔이 건강에 얼마나 악영향을 끼칠까. 지금은 술과 담배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인스턴트커피 한 잔 정도는 내가 좋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입니다. 정말 아무런 대책 없이 살았던 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직장을 다닐 때 일 년에 한 번씩 정기 건강검진을 받았습니다. 온갖 나쁜 것들을 몸에 쏟아부은 상태에서 건강검진 날짜가 잡히면 며칠 동안은 건강검진에 나쁜 영향을 미칠까 봐 몸을 사렸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참으로 미련했습니다. 그날 하루를 위해서 며칠 눈 속임으로 좋은 결과를 기대했다는 것이 과연 정당한 소망이었을까.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없었습니다. 의사선생님은 매번 바뀌었지만 같은 권고를 하셨습니다. 술을 줄이십시오, 담배를 끊으십시오, 스트레스를 줄이십시오, 그리고 의사선생님 앞에서 매번 같은 대책 없는 삶의 변명을 늘여 놓았습니다.

"술은 줄이지 못하는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술은 몸에 맞지 않아 진절머리가 나고, 그래서 술 먹기는 정말 싫고, 그런데도 술을 먹어야 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회의가 너무 많습니다. 회의가 끝나면 술을 먹어야 합니다. 술에는 대책이 없었습니다. 회사를 그만두는 날까지 반드시 먹어야 되는 정말 맛없는 밥과 같았습니다."

"담배는, 담배를 피우는 것은 회사를 잠시 탈출하는 것이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9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는 시간과 로비를 지나 흡연구역까지 걷는 시간과 담배가 꽁초로 휴지통에 버려지는 시간이 얼마나 행복한 시간인데 그것마저 끊으라고 하십니까. 담배를 피우는 의사선생님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징그러운 사이클을 도대체 어떻게 끊어야 합니까. 그리고 스트레스를 줄이는 방법을 아시면 좀 가르쳐 주십시오." 의사선생님은 답합니다. "술은 주는 대로 다 마시지 말고 요령껏 몰래 버리세요, 그리고 담배를 끊는 게 스트레스라면 그냥 기분 좋게 피우세요". '당신처럼 정말 대책 없이 사는 사람들이 세상에 가득하다.'라는 말로 들렸습니다.

그 말은 이렇게도 들렸습니다. "마치 매일 같이 목으로 넘어가는 밥이 진절머리가 나고, 먹기가 싫어지더라도 먹기 위해 살고, 살기 위해 먹어야 하는 것처럼 어쩔 수 없이 해야 될 것이라면 그냥 밥 먹는 것처럼 죽는 날까지 먹어야 됩니다. 대책이 없습니다." 대책이 없다고..., 회사를 그만두어야 사이클이 끝날 것 같다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며칠 뒤 건강검진 결과가 나왔습니다. 2년 전 자료와 비교해서 좋아진 수치는 없었습니다. 점점 고위험군으로 가까이 향하고 있는 숫자들이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직장동료와 담배를 피우러 나갔습니다. 담배를 끊지 못하는 스트레스를 받느니 차라리 피우라는 의사선생님을 만났다고 얘기해 주었습니다. 대책 없는 삶의 대책은 정면 돌파였다고.

직장동료는 웃으며 의사선생님의 말에 동의하는 듯 회사를 그만두지 않고서는 담배를 끊을 생각이 전혀 없다고 얘기했습니다. 담배연기와 함께 뿜어져 나오는 그 역한 냄새 나는 멘트 역시 대책이 없다는 듯 들렸습니다. 어른이 되었다는 상징성과 홍콩 누아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뿌연 담배연기를 내뿜는 주인공의 멋스러움에 매료되어 시작한 담배는 대책 없는 삶을 상징하는 일부가 되었습니다. 아무런 대책 없는 삶은 점점 지쳐만 갔습니다.

언제쯤 안정된 삶의 여유를 즐길 수 있을까, 언제까지 쉴 틈 없이 일을 해야만 할까, 오십이 다 되어서야 아주 조금 알 것 같았습니다. 죽는 날까지 밥과 모닝커피 한 잔을 먹기 위해서는 죽을 때까지 일을 해야만 하고 안정된 삶의 여유를 즐긴다는 것은 스스로 숟가락을 들고 밥을 먹을 수 있는 건강한 삶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밥 먹듯이 한다"라는 표현이 주는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밥을 밥 먹듯이 못한다면 정말 큰일입니다.

이미 웬만한 일에 대해 대처할 계획이나 수단은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술과 담배를 끓으면 건강을 지킬 수 있다는 뚜렷한 대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책 없이 살 것이냐, 매일 밥 먹는 것이 당연함처럼 대책이 필요 없는 것에 굳이 대책을 세워가며 힘들게 살 것이냐, 지금까지 쾌락은 버리기 싫었고 건강을 위해 당연한 해야 하는 것은 거부했습니다. 사소하지만 습관처럼 아침에 마시는 맥심 모카커피 한 잔으로도 의외로 버텨지는 게 어쩌면 희망하는 안정된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무엇을 한다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많이 하고 살았습니다. 반면 "이것을 하지 못한다면"이라는 상실감은 불안하기에 생각조차 하기도 싫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데 그렇게 큰 변화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작은 습관의 변화로 삶이 달라지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나쁜 습관과 생각을 버리는 것은 상실감이 아니라 건강한 삶의 변화를 이끄는 대책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측하지 못한 상실감이 주는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대책은 건강한 몸과 희망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뿐입니다. 희망이 있으면 버틸 수 있습니다. 희망마저 포기하고 산다면 정말 대책 없는 삶이 될 것입니다. 건강함과 희망이라는 버팀목으로 매일 "밥을 먹듯이 하는" 대책 없는 삶을 즐길 것입니다.

#대책 #건강 #희망 #커피인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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