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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옛골소년 May 14. 2020

딸아이 머리 감겨주기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동여매고 거울 앞에 앉아 있는 딸아이가 아빠를 부릅니다. 딸아이에게 다가가 가만히 지켜보니 머리를 만지는 딸아이의 얼굴은 복숭아처럼 울긋불긋 빨겠습니다. 수건을 풀자 수분을 잔뜩 먹은 채 축 늘어진 머리카락에 바람이 필요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머리 말리는 게 귀찮은 듯 지나가는 아빠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아빠에게 헤어드라이어를 쥐여주며 미용실을 찾은 손님이 되어 볼 테니 미용사처럼 부드럽게 머리를 말려달라며 복숭아 같은 얼굴에 미소를 띱니다.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행복한 부탁이었습니다. 빽빽하게 줄지어 있는 울창한 머리 숲의 원인을 제공한 미안함(?)으로 비가 내린듯한 머리 잎에 바람을 넣으니 울창한 숲이 되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잔뜩 물먹은 머리카락의 향이 온풍을 타고 코에 닿는 순간 딸아이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아빠가 머리 다시 감겨줄까?", "왜, 냄새나?", "응, 아빠!, 너무 힘들어ㅋㅋ", 키가 자란 만큼 딸아이의 정수리가 코에 가까워졌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큰 만큼 냄새도 무럭무럭 익어갔습니다.

  화장실로 들어가 머리 감는 자세를 잡아봅니다. 딸아이는 화장실 문턱에 걸쳐 앉고 아빠는 욕실의자에 앉아서 머리를 감겨주기 시작합니다. 향긋한 샴푸 향의 거품이 가득한 아이의 두피를 손가락에 힘을 주어 빡빡 문질러 봅니다. 딸아이는 간지럽다며 머리를 감는 내내 웃음을 참지 못하고 깔깔대며 웃고 있습니다.

  딸아이의 기억엔 이미 사라졌지만, 꼬맹이 때 아빠가 머리를 감겨주던 느낌을 되살려 보라고 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머리 감기이지만 딸아이의 추억은 다시 저장되었습니다. 어린아이의 모습은 사라진 채 머리를 숙인 모습의 딸아이에게 마음껏 두 손이 닿을 수 있는 두피를 오랫동안 문질러 댔습니다.

  어쩌면 성장하는 딸아이와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행복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한참 동안 머리를 감겨 주었습니다. 젖은 머리를 말리기 위해 욕실의자에 앉은 딸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이런 행복이 오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은 땅에 누운 나무에서 싹이 돋는 듯 향긋한 샴푸 향과 함께 전해졌습니다.

  그런 욕심이 너무 과했던 것일까요, "아빠, 머리가 너무 뜨거워, 이제 그만 말려", 그러고 보니 헤어드라이어도 뜨겁고 딸아이의 머리고 뜨겁고, 손도 뜨겁고, 마음은 따뜻했습니다. 다 큰 딸을 나무라듯, 지켜보던 아내가 한마디 합니다. "너는 언제쯤 머리를 제대로 감을 수 있겠니", "아니, 엄마의 뻣뻣한 머릿결과 아빠의 빽빽한 머리숱을 그대로 물려주고도 그런 말이 쉽게 나와, 엄마는 내가 머리 감을 때마다 얼마나 힘든지 알아", 언제나 철저하리만큼..., 아이들은 엄마의 공격에 준비된 멘트가 장착되어 있었습니다.ㅋㅋ

  "어때, 아빠가 머리 감겨주고 말려주니까", 딸아이는 머리카락을 코에 가져가며 샴푸 향이 너무 좋다고 웃습니다. "같은 샴푸에 린스인데 향이 더 좋아?", 그런가 봅니다. 지쳐있던 생활 속에서 아빠의 손을 거쳐간 샴푸 향은 다른 느낌으로 전달되나 봅니다. "그런데 어쩌지!, 아빠는 오늘 정수리 냄새가 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은데ㅋㅋㅋ"

  동생의 찰랑거리는 머리를 지켜보던 아들내미에게 한마디 건네 봅니다. "어때, 너도 머리 감겨 줄까", "아니, 그 정도는 알아서 할 수 있어", 부쩍 알아서 한다는 말이 많아진 아들, "아들, 아빠가 정수리 냄새 한 번 맡아 보고 싶은데, 안되겠니ㅋㅋ", 꼬맹이 아이들을 안을 때나 책상다리 위에 앉힐 때면 제일 먼저 코에 닿은 정수리 냄새가 그리웠나 봅니다.

언젠가는 엄마, 아빠의 품을 떠날 때가 오겠지요, 사는 것은 서툴지 몰라도 아이들에게 추억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만큼 서툰 것은 없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같이 있는 공간에서 일어났던 작은 행동들이, 먼 훗날 아이들의 행동으로 추억이 될만한 것으로 문득문득 생각나는 것은 그리 화려하지 않아도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딸아이 #추억 #머리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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