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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옛골소년 May 22. 2020

조용한 가족의 소박한 외식

 금요일 저녁이면 아이들이 카페로 온다. 집에만 있는 아이들에겐 바깥공기를 맡을 수 있는 즐거운 외출이다. 손님이 없다면 이른 마감을 하고 삼청동에 있는 중국집으로 짬뽕을 먹으러 갔다. 딸아이가 좋아하는 짬뽕을 먹기 위해서는 늦어도 저녁 8시 30분까지 중국집에 도착해야 한다. 저녁 8시 전에는 카페에 손님이 없어야 되고, 그래야 짬뽕을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온다. 기회의 유무는 오로지 손님에게 달렸다.

 짬뽕이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을 수없이 경험했다. 밥을 먹기 위해 기다리는 아이들은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고 대화를 이어가는 손님은 우리 가족의 계획을 알 리가 없다. 그래서 카페를 찾아 준 반가운 손님이 카페를 빨리 나가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이상한 광경이 종종 연출된다. 짬뽕은 선택이 아니라기회가 있을 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되었다.

 그래서 8시가 가까워질수록 딸아이의 얼굴은 점점 굳어진다. 좋아하는 짬뽕을 먹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얼굴에 나타난다. 기다리다 못해, 오빠와 둘이서 먹으러 갔다 오라고 하면 그건 또 싫다고 한다. 아빠랑 같이 가야 더 맛있다고 한다. 의리를 짬뽕 한 그릇으로 배워가는 고맙고 귀여운 딸아이다.

 지난주에도 짬뽕도전기는 실패했다. 그렇다고 손님을 원망할 수는 없다. 그리고 짬뽕을 먹지 못하는 안타까움으로 손님의 시간에 맞춰 사는 아빠의 일에 대해 실망을 할 나이는 지났다. 짬뽕을 먹지 못하면 차선책이 있었다. 마을버스를 타고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내린 후 경복궁역까지 데이트를 하는 기분으로 딸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간다. 아들내미는 한 발짝 뒤에서 후방 경계를 하듯 따라온다. 늘 한결같은 든든한 모습이다.

 술집으로 변신하는 밥집 이외에는 대부분 문을 닫은 늦은 시간, 경복궁역 부근에 즐겨가는 단골 분식집이 있다. 분식이라도 아이들과의 소박한 외식은 늘 즐겁다. 우동 한 그릇과 돈가스를 나눠먹는 즐거움을 가지기엔 장소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빠는 어린 시절에 이런 호사도 즐기지 못했다는 꼰대 멘트에도 아이들은 마냥 즐겁기만 하다.

 그런데, 얼마 전 우리 가족에겐 나름 소중했던 분식점이 다른 간판으로 바뀌었다. 여전히 우동과 돈가스 메뉴는 있었지만 맛이 전혀 달랐다. 그래서 또 다른 차선책으로 경복궁역 재래시장에서 식당을 찾아 나섰다. 예전에 몇 번 들렀던 체부동잔치집에서 칼국수를 먹기로 했다. 경복궁 맛집답게 늦은 시간이지만 손님들이 꽤 들어선 곳에서 늦었지만 즐겁고 소박한 외식이 시작되었다.

 잠시 후, 술병이 놓인 한쪽 테이블에서 욕설과 함께 격한 대화가 새어 나왔다. 그리고 지하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비틀거리면 오르내리는 취객도 눈에 띄었다. 그 광경을 보던 딸아이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순간 대화를 잃어버린 조용한 가족이 되었다. 칼국수를 먹자고 했던 미안함 때문에 국수를 목으로 넘기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딸아이가 그 모습을 보고 "아빠, 좀 천천히 먹어"라며 주의를 준다. 그런데 내겐 국수라는 게 속도 조절이 불가능한 음식이었다. 끼니를 놓친 후 허기짐을 채우거나 불편한 자리에서 빨리 먹어 치우기엔 최적의 메뉴였다. 다음엔 국수를 먹으며 고기를 씹는 느긋함을 즐기기 위해 육쌈냉면을 시키리라 다짐해 본다.

 정신없이 칼국수를 들이킨 채 식당을 빠져나오며 딸아이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딸아이의 입에서 짜증 섞인 말이 새어 나왔다. "술 먹고 욕하는 사람들 정말 싫어", 그리고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술을 먹는 사람들, 정말 보기 싫어", "분식점은 간판을 왜 바꾼 거야". 익숙지 않은 광경에 거부감이 상당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딸아!, 실망하기엔 아직 거친 세상을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어떡하니", 딸아이의 의아해 하는 표정에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아빠는 술 먹고 욕하는 아저씨들과 비틀거리며 계단을 오르내리는 모습이 너무 익숙하고, 그립기까지 한데", 딸아이는 "그동안 맞지 않은 술에 힘들어했으면서, 별걸 다 그리워한다"라는 말과 표정으로 아빠를 쳐다보았다. 싫든 좋든 간에 해야되는 게 있었고 지나고 나면 추억이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아들에게 물어보았다. "너도 평소에 저 정도 욕은 하지 않니?, 아들은 수긍한다는 듯 웃음을 보였다. 그런데 "아빠가 겪어 보니까, 거친 세상을 꿋꿋하게 살아가려면 저 정도 욕은 대수롭지 않게 감당하며 살아야 돼", 아이들에게 해 줄 말은 아니었지만 현실 부정의 도적적인 멘트만 늘여 놓기에는 이미 다양한 욕으로 인해 거칠 대로 거칠어진 세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많은 욕이 어떻게 생겨났을까..., 욕이 사라지려면..., 천시되고, 무시되고, 하찮게 여기는 생각과 행동들이 없어져야 하는데, 아무리 익숙해지려고 해도 욕은 하기도 싫고 듣기도 싫으니 욕금지법이라도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아무튼 아이들이 시장통 밥집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 삶의 단면을 엿볼 수 있었으면 한다. 그래서 오늘도 짬뽕의 미련과 맛이 변해버린 우동은 포기하고 지난주와 같은 장소에서 육쌈냉면을 먹기로 했다. 오늘은 어떤 사람들의 거칠고 투박한 얘기와 비틀거림이 있을지, 생생한 삶의 드라마를 보러 가기로 약속했다.

#가족 #외식 #짬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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