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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옛골소년 May 25. 2020

길 안내자의 이중인격

 삼청동에서 약속이 있다는 아내와 같이 여느 때와 같은 시선, 생각으로 일터로 향했습니다.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걸음걸이의 속도는 다릅니다. 다시 시작하는 월요일, 조금은 활기찬 발걸음으로 같이 길을 걸었습니다. 익숙한 골목길 풍경에 시선을 고정한 채, 불안함으로 당기는 생각의 힘보다 긍정적인 바라봄으로 눌러가며, 명상을 하듯이 세 영역의 비율을 조화롭게 유지하며 같이 길을 걸었습니다.

 일터로 향하던 골목길에서 뒤따라 오던 차량의 검은 창문이 열리며 길을 물어보는 운전자의 눈과 마주쳤습니다. 그리고 "저기요, 길을 모르는데 좀 여쭤봐도 될까요?"라고 말을 건넸습니다. '한 번만 가르쳐 주시면 금방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요'라는 갈망하는 듯한 운전자의 눈빛이 보였습니다.

 청와대 앞길을 제외하면 집에서 일터로 향하는 길의 대부분은 좁은 도로를 끼고 있는 골목길입니다. 거주하고 있는 사람에겐 익숙한 골목길이지만 초행길인 운전자에겐 미로와 같을 수도 있습니다. 그게 뭐라고, 알고 있는 질문을 받으니 낯선 사람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과잉 친절의 에너지가 솟구쳤습니다.

 그래서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도 길을 찾지 못하는 운전자에게 최대한 친절하게 길 안내를 했습니다. 어설프게 가르쳐 주거나, 모른다는 대답으로 미안함을 가지는 것과는 달리 알고 있는 길을 단순 명료하게 그리고 친절함을 더해서 전달하는 쾌감이 좋았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내가 "모르는 사람한테 친절 한척하지 말고, 나한테도 좀 상냥하게 가르쳐 줄 수 없어"라고 얘기합니다. 순간 과잉친절의 쾌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낯이 뜨거워지는 묘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생각해보니 '내가 그랬었나'가 아니라 분명 '내가 그랬었지'였습니다. 어제, 핸드폰의 기능을 가르쳐 주며 아이들 앞에서 아내에게 핀잔을 주어가며 무안하게 만들었던 게 몹시 서운했던가 봅니다.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민망함, 그리고 미안함...

 그러고 보니 나와 아내도 조금 전 운전자처럼 잠시 길을 잃은 것처럼 목적지를 찾으러 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적지 부근에서 맴도는 스트레스를 없애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잘아는 사람에게 길을 묻는 것이었는데, 가까이 있었던 사람의 알고 있는 느긋함이, 모르고 있는 아내의 불안함을 민망함으로 변하게 대했던 것이었구나...

 어쩌면 오늘은 아내를 대해야 하는 방법에 대한 길을 잠시 잃었을 때 바른길을 갈 수 있도록 해준 기회의 날이었습니다. "모르면 가르쳐 주시면 안 돼요?, 야단만 치시지 마시고요, 가르쳐 주시면 당장은 아니라도 잘할 수 있을 텐데, 야단만 치시면 전 아마도 평생 열등생으로 살 수도 있습니다". 어느 드라마에서 직장 초년생이 선배사원에게 했던 유명한 대사가 생각나는 하루였습니다. 그리고 길을 물어보던 운전자가 남자였기에 천만다행이었다는 안도감(?)이 드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아내 #길 #운전자 #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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