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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옛골소년 May 27. 2020

오랜 기다림, 학교 가기 전날 밤

 완전하지는 않지만, 드디어 아이들이 개학을 했습니다. 어제저녁, 딸아이는 밀린숙제를 한다며, 방해하지 마라며, 방문을 걸어 잠근 채, 숙제로 인해 시간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12시가 다 되어 방에서 나온 딸아이의 눈을 보니 얼마나 집중을 했었던지 눈가가 촉촉했습니다. 그리고 "엄마, 숙제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

 "어떡하지, 숙제 없는 세상은 없는데, 그러게 미리미리 좀 해놓지 그랬어", 엄마가 대답을 했습니다. 며칠 전 20대 국회가 임기 종료를 불과 얼마 남기지 않고, 밀린숙제를 하듯이 133건이나 되는 법안을 처리했다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그렇게 할 것이라면 진작에 좀 하지..., 정치를 하는 어른들도 밀린숙제를 아이들처럼 하고 있으니 아이들에게 미리미리 좀 해 놓으라는 말이 그리 쉽게 할 말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딸아이의 밀린숙제에 힘겨워하는 모습에, "회사에 가도 지금처럼 매일매일 숙제를 해야 되는데, 그리고 잘못하면 혼도 나야 되고",라며 아빠도 한마디 거들었습니다. "그럼, 난 회사 안 다닐 거야", "그럼, 무엇을 하고 싶어"
"아빠가 AI(인공지능)가 흉내 낼 수 없는 기술 배우는 게 어떠냐고 그랬으니까 기술을 배워볼까",

 "기술도 종류가 많은 데 뭘 하고 싶어, 글쎄, 뭘 하면 좋을까..., 그냥..., 지금은 모르겠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과 답이 한참을 오고 갔습니다. 그렇게 개학을 앞두고 밀린숙제가 화두가 되어 가볍게 시작된 대화는 현재와 미래를 오가며, 아이의 미래의 직업을 주제를 가지고, 가상으로 원하는 대학도 졸업해보고 취업도 해보았습니다.

 회사원 생활을 오래 한 아빠에게 아이들은 회사에 가면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해했습니다. 직원들이 안전하고 쾌적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위해 현장도 관리하고, 사무실도 꾸미고, 물건도 사고, 너무 과하게 요구하면 만나서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하고, 설득도 해야 되고, 서로 의견이 맞지 않으면 싸우기도 하고 등등, 아이들이 쉽게 이해하기 위해 자세하게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너무 자세한 설명이 오히려 거부감을 들게 했을까..., 거의 매일같이 파김치가 되어 퇴근하고, 날카롭게 날 새워진 신경질적이었던 아빠의 모습에, 그리 좋지 않은 기억 때문이었는지 회사원의 삶에 대해 조금은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했습니다. 단지 회사 생활을 열심히 했을 뿐인데 가끔씩 정신력과 체력의 한계를 보여주었던 모습이 오히려 아이들에게 부작용이 되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밀린숙제로 시작했던 얘기는 다양한 직업을 나열해가며, 엄마, 아빠의 직접경험과 간접경험을 곁들여, 여기저기를 들락날락하며, 새벽 1시가 되어서 끝이 났습니다. 회사를 다니든 기술을 익혀서 자영업을 하든 뭐하나 쉬운 게 없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아이들에겐 희망적인 얘기로 각색해서 들려줘야 하는 부담감은 아이들이 커갈수록 같이 커져만 갔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SNS나 뉴스를 통해 부정적인 뉴스를 접했던 것들에 대해 다양한 시각으로 해석하며 설명을 하는 것이 무엇보다 힘들었습니다. 엄마, 아빠가 받아왔던 교육과 어릴 적 부모님에게 전해 들었던 얘기들, 그리고 직접이든 간접이든 그동안의 경험으로 터득하고 알게 되었던 것들이 시간이 흘러, 지금 와서 전혀 다르게 재해석 되는 세상에서,

 어른들도 무엇인가에 속은 듯한 세상에서, 아이들에게 사실은 사실대로 아닌 것은 아닌 것으로 꼭 집어 얘기해 주어야 되는 부담감은 점점 커지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정신없고 불안한 현재를 살고 있는 아이들에게 역사 교과서에서나 적혀있는 19세기의 급변했던 시대에서 가능했던, 20세기의 성장이 급속도로 진행되었던, 그때니까 그 시절의 맹목적인 노력으로도 잘 먹혔던 성공의 원리가 더 이상 명확하고 간결하게 설명이 되지 않은 다는 것을 생각하며,

 아이들과 얘기를 끝낸 후,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뭔가 열띤 얘기가 오고 갔음에도 개운치 않은 느낌..., 하지만 밀린숙제로부터 시작되어 직업의 선택적 갈등에 이르게 된 이 복잡한 생각과 감정을 스스로 정리할 수 있는 성장도 필요하기 때문에..., 가끔씩 말문이 막히는 엄마, 아빠의 생각을 스스로 정리해보는 숙제도 성장의 기회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한참을 뒤척이며 늦은 잠을 청했습니다.

#개학 #밀린숙제 #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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