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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옛골소년 Jun 04. 2020

농부인 부모님의 기쁨

 이른 아침 모친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늦잠을 자거나 입맛이 없어서 아침을 건너 뛰지 않는 이상 아침은 대부분 챙겨 먹고 있었지만, 팔순이 넘은 모친은 아침 일찍 전화를 할 때면 한결같이 '아침은 먹었냐'라는 인사로 안부를 묻습니다. 그런 모친의 전화로 아이들에게 아침밥을 강요하기도 합니다. '봐라, 아침밥 제대로 먹는지 할머니가 물어보시니까, 얼른 아침밥 먹자'.

 걸어서 학교 가기 1주일, 핸드폰으로 학교 가기 1주일, 아이들의 이상한 학교 가기 때문에 아침 먹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아침 입맛도 들쭉날쭉하여 온라인 학교 가는 날은 아점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코로나가 시작되고 나서부터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은 기간 동안 무서운 기세로 쌀이 줄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친에게 그 모양이 쌀독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정신없이 줄어든다는 표현으로 전화를 몇 번 드렸더니, 그게 신경이 써이셨는지 '쌀은 아직 남아있냐'라는 전화를 하시는 횟수가 부쩍 늘었습니다. 막내아들의 주문에 앞서 모친이 먼저 쌀이 떨어지지는 않았을까 걱정이 되신 모양입니다.

 그러고 보니, 몇 달 사이에 마치 마트에서 쌀을 주문하듯 모친에게 전화를 드려서 쌀을 보내달라 고, 그 다음날이면 집 앞에 도착한 쌀을 보며 곳간 창고가 다시 채워지는 행복감을 느꼈습니다. 포장박스에 적혀있는 고향집 주소와 나란히 적혀 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을 보며, 고향집에 멀리 계셨지만 부모님과의 거리는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얼마 전 보내주신 쌀의 양을 확인하고는 아직은 넉넉하니 신경 써지 않으셔도 된다고 했습니다. 직접 농사지은 쌀을 곳간에서 빼내 자식들에게 채워주시는 수고가 부모님이 누리는 기쁨이었습니다. 쌀이 전해주는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쌀로 인해 삶의 일부에서 인식되는 작은 기쁨의 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에 행복감이 밀려옵니다.

 그리고 쌀을 포장했던 종이박스를 나중에 그대로 가져오라는 모친의 말에 웃음이 터졌습니다. 고향집에는 박스가 귀하다는 말에 '그동안 일방적으로 받기만 했었구나'라는 생각에 잠시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부모의 자식 사랑의 결과로 박스의 불균형이라는 부작용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의 사랑에 과연 균형을 이루는 갚음은 얼마나 채워야 가능할까..., 그것이 가능이나 할까..., 생각해 봅니다.

 아버지는 아침 일찍 논에 물을 보러 가셨다고 합니다. 땅이 주는 수확의 기쁨이 자식에게 전달되는 행복을 꿈꾸며 물을 보러 가실 때만이라도 산책하듯 논둑을 거니는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수십 년 동안 변함이 없는 땅에서 수확의 많고 적음을 오직 자연에게 맡겨진 운명처럼 지켜보시던 검은 얼굴이 그려집니다.

 정해진 땅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면 수확의 흥미를 잃었을 것입니다. 씨를 뿌리고 뿌린 만큼 거두는 작은 기쁨으로 농부의 삶은, 기쁨은 끝없이 순환되고 있었습니다. 과함의 절제도 필요 없고 시간의 흐름을 재촉하거나 재촉당하지도 않습니다. 자연이 허락하는 만큼의 양을 손에 넣을 뿐입니다.

 욕심을 부린 죗값을 치러는 것이 아님에도 벼가 쓰러지는 모습을 그저 묵묵히 바라볼 뿐, 바람을 탓하지 않고 다시 일으켜 세우는 순환을 반복하며 살아가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농사꾼의 자식이 바라본 세상은 반대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가능하면 많이, 빠르게라는 것이 일상이 되고 중독이 되어 갔습니다.

 많이 가지고 싶은 쾌락에 휩쓸려 어쩔 줄 몰라 작은 기쁨이 줄어가는 것을 모른 채 살고 있었습니다. 뭔가 대단한 것을 소유하기 위한 욕망의 충족에서 오는 쾌락은 순간이고, 작은 기쁨을 누리는 횟수를 쌓아가는 것이, 농부인 아버지의 수확의 흥미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그런 삶이, 비록 가난한 농부에게 주어진 삶처럼 치부되더라도, 큰 것을 쫓아 일상에 흩어져 있는 작은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삶이 오히려 가난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작은 기쁨을 찾는 농부의 흥미로운 삶의, 기쁨의 의미를 새겨봅니다.

#농부 #모친 #아버지 #수확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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