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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옛골소년 Jun 05. 2020

일기예보하듯 기분예보를 해주는 아내

 잠을 깨우는 감미로운 음악이 알람 소리로 울린다. 여전히 몸을 감싸고 있는 피로와 이불의 포근함을 조금이나마 홀가분하게 벗어던질 생각으로 좋아하는 음악으로 알람을 설정해 놓았다. 알람을 해제하는 행동을 몇 번씩 되풀이하고 나서야 시린 눈을 비비며 아침 뉴스를 검색한다.

 세상이 돌아가는 모양을 잠시 관찰해 본다. 코로나와 관련된 소식은 몇 달째 화면의 상단에 놓여있었고 반갑지 않은 뉴스들로 채워진 화면을 금세 닫아버린 채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른 아침, 도시의 소음이 시작되기 전에 적막함을 깨우는 산비둘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반가움에 앞서 처음엔 귀를 의심했다. 서울 도심에서 산비둘기 소리를 듣게 될 줄이야, 택시를 타면 목적지를 인왕산 수성동계곡이라고 수없이 말했지만, 내가 지금껏 보아온 계곡에 비하면 보잘것없이 느껴졌던 이유에서,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었을까..., 생각해 보니 서울에서 계곡 근처에 사는 호사를 누리고 있었다.

 산비둘기는 분명 인왕산 수성동계곡 어디쯤 자리를 잡고서는 아침을 알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을 것이다.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아내를 깨워서 산비둘기 울음소리를 같이 듣고 싶었지만, 며칠째 불면증으로 괴로워하던 아내에게 산비둘기 소리를 같이 듣자고 잠을 깨우는 용기가 선뜻 나지 않았다.

 산비둘기 울음소리는 고향집에서 익숙하게 듣고 자랐다. 아내와 내가 유년시절을 보낸 곳이 지방의 소도시라는 공통점 이외에는 분명 다른 환경이었음을 알고 있었고, 아내도 산비둘기 소리를 익숙하게 듣고 자랐다 하더라도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는 지금은 산비둘기 소리를 여유롭게 들을 만한 상황이, 기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서로가 잘 알고 있는 것도 서로의 기분이 맞아야 공감이 되고 호의적인 대화로 이어졌다. 아무리 오랜 시간을 같이한 부부라도 상대방의 기분을 알아채고 눈치를 봐가며 대화를 시작해야 될 때가 있었고, 눈치 없이 시작된 대화는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일깨우려는 듯한 오해가 되어 분위기가 금세 냉랭 해지기도 했다.

 파도의 높이를 보고 배를 띄워할지 말아야 할지 가늠하듯, 감정의 파고는 바다의 기분에 따라 달라졌다. 잔잔한 파도는 금세 거칠어지기도 했고, 고 푸른빛을 띠고 있던 바다는 순식간에 검은색으로 변하기도 했다. 기분의 처짐은 호르몬의 불균형을 의지대로 조절할 수 없는 것처럼, 성난 바다가 거친 파도가 다시 잠잠해지기를 침묵으로 기다리는 것과 같았다.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평소의 작은 행동이 때로는 상대방에게 몹시 기분 나쁜 결과로 전달되기도 했다. 그래서 아내는 충돌과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기분예보를 했다. '나 오늘 몹시 피곤하니까, 건드리지 마!', 그래서 아내는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일기예보하듯 기분예보를 한다. 그렇게 다시 바다가 고요해질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도 필요했다.

 최근 들어 잦은 기분예보가 몹시 신경이 써이기도 하지만, 자기의 기분을 숨긴 채 감정노동을 하는 것이 일상이니 서로 잘 아는 사람만이라도 기분을 맞춰주는 호의를 갖고 대해주는 것이, 그리고 오히려 안방 분쟁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상대방에게 기분예보를 해주는 것이 가정의 평화를 위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한날은 사소한 안방 분쟁을 지켜보던 딸아이가 엄마, 아빠의 핸드폰을 동시에 가져가서 상대방을 어떻게 저장하고 있는지 확인을 하고서는, '여보', '남편'이라고 저장된 연락처를 '하트+하나뿐인 내 편+하트'로 바꿔 주었다. 그 후로 전화를 하거나 카톡을 주고받을 때 그동안의 건조함이 달달함으로 촉촉하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작은 변화가 가져다주는 행복한 경험을 했다.

 오늘따라 산비둘기의 소리가 유난히 선명하게 들리는 아침이었다. 고향의 뒷동산에서 날아온 듯, 그 시절의 아련한 기억들을 떠올리며 아침을 반겨주던 소리였다. 잠에서 깬 아내에게 산비둘기 소리를 들었고 반가워서 하마터면 깨울 뻔 한걸 간신히 참았다고 했더니,

 만약 깨웠으면 뒷감당을 하지 못했을 거라며 안 깨우길 잘 했다는 칭찬(?)을 받았다. 아내의 귀에도 산비둘기의 울음소리가 여유롭게 들리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그래도 함께 듣는 소리가 되었으면 하는 기대로, 다시 산비둘기의 웃는 소리를 기다린다. 산비둘기 웃음소리로 행복해지는 아침이었다.

#아내 #산비둘기 #기분 #기분예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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