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옛골소년 Jun 10. 2020

양보하며 걸어가는 길

 날씨가 더워지니 걸어서 다녔던 출퇴근길이 고행길처럼 되었다. 아주 미세해도 좋으니 아침 바람의 선선함을 기대하며 나섰던 현관문 앞에서 한걸음 내딛자마자 오늘의 무더운 날씨가 짐작되었다. 짧았던 봄은 아침저녁의 시원함으로 날씨가 좋으면 좋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걸어서 다니기에 꽤 괜찮았다.

 6월 초순부터 이른 더위가 시작되었으니 올여름은 보통의 각오를 하지 않으면 감정 조절에 실패해서 격해지기 십상이겠다는 생각을 하며 출근길이 시작되었다. 아스팔트의 열기로 피어나는 아지랑이는 낭만도 없고 도시의 탁한 먼지 냄새는 늘 달갑지 않다. 늦은 오후부터 비가 온다는 소식에 무더위를 잠시 식힐 수 있다는 희망을 품어본다.

 일터까지는 도보로 20여 분 거리, 나무와 식물을 보며 여유롭게 걸어가는 날에는 짧게만 느껴지는 거리지만, 온통 머릿속에 덥다는 마음으로 걷는 길이면 배 이상의 거리로 느껴진다. 앞서가는 사람이라도 있는 날엔 넋 놓고 따라가는 재미라도 있지만 아무도 없는 길에는 아무 생각도 없이 잠시라도 머리를 식히기 위해 그늘을 쫓아 걷는다.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중간중간, 나만의 목표지점을 정하고 하나씩 지나칠 때마다 남은 거리를 가늠하며 걸어간다. 골목길을 지나 한눈에 들어오는 곧은 길에서 따가운 햇볕을 피하기 위해 높은 담벼락이 만든 좁은 그늘진 길을 따라 걷는다. 가끔은 마주 오는 사람과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이기도 한다.

 양방향에서 점점 가까워지는 어느 시점에서 둘 중 누군가는 좁은 그늘진 길을 비켜주어야 충돌을 피할 수 있다. 거의 동시에 서로 그늘진 길을 이탈하면 몹시 기분이 좋다. 모르는 사람끼리 마음이 통했다는 느낌, 내가 먼저 비켜주면 그런 기분도 나쁘지 않다. 가끔씩 기싸움에 밀려 패배자가 된 것처럼 변질되기도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양보해 준 행동에 스스로에게 칭찬하는 것으로 위로해 버린다.

 상대방이 나보다 먼저 길을 비켜주면 고마움에 기분이 좋다. 모르는 사람들과 짧은 거리에서 잠깐 느껴지는 양보, 배려의 마음에서 나오는 좋은 기운을 주고받으며 가는 길은 지루하지 않고 즐겁다. 걸어갈 때는 몸을 내 맘대로 조종하며 아주 쉽게 방향 전환을 해가며 가볍게 걸어갈 수 있다.

 운전대를 잡으면 같은 원리지만 이상하게도 자동차와 한 몸이 되어야 할 조종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생각대로 움직이는 몸에 비해 운전대를 잡으면 자동차는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이 된다.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도시에서 자동차를 운전하고 나서부터 그런 증상은 시작되었고 점점 더 심해진 것 같다.

 조용한 시골에서 여유롭게 운전을 배운 게 몸에 배어서 그랬던 것일까. 고향집이 있는 지방 소도시에서는 추월과 끼어들기는 굳이 필요 없었다. 자동차 경적은 위험을 알리는 것으로 아주 드물게 사용했고, 좁은 길에서 마주한 차량에게 양보를 해준 고마움의 표시로, 가볍게 '빵'소리를 내며 고마움을 전하는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다.

 도시의 경적은 상대방 차량을 재촉하거나 위협을 가하는 음파 대포의 발사 버튼처럼 사용될 때가 있다. 라이트의 기능도 사뭇 달랐다. 양보의 수신호를 보내는 용도이기도 했고, 국도를 달릴 때면 지금은 거의 보이지 않지만, 이동식 과속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으니 속도를 줄이라는 고마운 신호이기도 했다. 정신없는 도시생활이 시작되고 나서부터 상대방에게 양보의 고마움의 표시로 라이트를 켜주거나, 손을 들어 보이는 수신호를 받아본 적도 해본 적도 없는 것 같다.

 같은 시간으로 가는 시계를 보면서 도시인의 마음 시계는 속도는 제각각이다. 매일같이 치열한 전투를 치르는 전장이 돼버리는 도시에서 느끼는 속도감은 지하철도 KTX처럼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빠름의 중독 때문인지 보복운전이나 난폭운전이 대도시에서 훨씬 더 많은 것 같았다.

 지방 사람들이 도시로 뚫고 들어가기 위해서 난폭해진 것인지, 도시 사람들이 자기의 터전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방어 기전으로 위협을 하는 것인지, 뭐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촘촘하고 좁아터진 도로 위에서 고행길을 헤쳐 나가는 능력을 발휘하며 곡예운전을 하는 것은 맞지 않는 장소에서 발휘되는 잘못된 본능의 표출이다.

 잠시 그런 울분을 삭이기 위해서 도심을 벗어나 한적한 곳을 찾아 여유를 되찾기도 한다. 그리고 도시로 돌아가는 운전대를 잡으면 다시 거칠어지기를 반복하며 살고 있다. 들락날락하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분노조절 능력도 커졌으면 좋을 텐데, 톨게이트를 통과하면 여유라는 단어는 통행료가 정산되듯이 말끔히 사라지곤 한다.

 분노조절이 쉽게 되지 않는 그런 복잡한 도시가 좋기라도 하듯, 좁은 도로 위에 경적을 울리며 줄지어 서있다. 고향을 찾거나 한적한 곳으로 나들이를 즐기는 시간 동안 여유로움을 되찾아 착하고 순한 자식이자 가족이 된다. 쉽지는 않지만, 그 마음 그대로 다시 도시로 향하는 운전대를 굳세게 잡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양보 #운전 #양보운전 #길

작가의 이전글 지극히 나의 것에 관한 기록을 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