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밥을 먹기를 바라는 진짜 이유
밥을 한창 차려놨어요.
평소에는 밥하나 국하나 아니면
밥하나 반찬 하나인데
맘 먹고 반찬을 무려 두 가지나 해서
아이의 밥상에 차려 놓았어요.
얼마나 뿌듯해요.
엄청 뿌듯하더라구요.
'와 내가 오늘 엄마답게
반찬을 무려 두~~~개나 차렸어!!'
뭔가 엄마 노릇 제대로 한 것 같고...
이 맛있는 밥을 아이가
맛있게 먹어 주었으면 좋겠고.
사실 웃겨요.
반찬 2개가 뭐 거창한 것도 아니고
끽해봐야 계란말이에 멸치볶음인데
나는 엄청 대단한 걸 한 것 같아요.
게임을 하고 있는 아이에게
당당하게, 얼른 나오라고,
엄마가 이렇게 (대단한) 밥상을
차려놓았다고
불러대죠.
그런데 게임을 하고 있는 아이는
제 밥상에 관심이 없어요.
나 같으면
'우와 엄마가 밥 차려눴다!!!'하면서
버선발로 달려 나올 것 같은데
아이는 관심이 없어요.
그걸 보면서 나는 서서히 부글부글
끓어 올라요.
'야! 밥 먹기 싫으면 먹지마!'라고
소리치고 싶은 맘을 가다듬고
최대한 우아하게 얘기해요.
'윤찬아.
너 그냥 밥 먹고 싶을 때
그냥 밥 먹어.
근데 나..
너 밥 먹을 때 책은 안 읽어 줄거야.
그냥 알아서 먹어'
아주 싸하게~~~~
분명 화를 내는것 같은데
누가 화내냐고 물으면,
나는 절대 화를 내지 않았다며
우길 수 있을만큼..
나대로는 아주 우아하게
(하지만 아이에겐 야비하게)
반협박식의 멘트를 날려요.
'내가 너를 위해서 이렇게 고생했는데
너는 나를 알아주지도 않네~~'
'나는 누가 밥 좀 차려줬으면 좋겠는데,
너는 차려줘도 안먹어?'
'너가 원한다는 것만 한다 이거지~~
그럼 나는 너가 원하는거
하나는 뺏아버릴꺼야
복수할꺼야!!!!'라는 맘이
내 맘에 회오리 치기 시작해요.
그런데 이제 나 쫌 성장한 사람이라고
생각이 드는게 ㅋㅋㅋ
저 휘몰아치는 생각을
쓰나미로 변신시켜
내 아이를 덥쳐버리는게 아니라
멈춰서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어요.
저 많은 생각들이 결국은
나의 결핍에서 비롯 된 것이라는 걸
이제는 아니깐요.
화를 내봤자
결국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이제는 아니깐요.
그렇다고 내 휘몰아치는 모든 감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예요.
말그대로 멈출 수 있고,
그 분노를 아이에게 던져놓고
나몰라라 하지 않을 수 있을 뿐이죠.
열심히 차려준 밥을아이가 안먹었을 때
우리는 왜 화가날까요?
'아이가 걱정이 되어서'
'아이를 위해서'
라고 말씀 하실 껀가요?
우리는 누구를 위해 그토록 밥을
열심히 차리는 걸까요?
'아이를 위해서'
라고 말씀하실 껀가요?
음식을 준비하면서 저는 부푼꿈(?)에
부풀어 있었죠.
밥 잘 차려주는 엄마가 되는 부분 꿈.
좋은 엄마 코스프레해서
나는 내 엄마와 다른 사람임을
확인하는 꿈.
그 부푼꿈은 누가 완성해 줘야 하나요?
네, 맞아요.
그 부푼꿈의 완성은 아이예요.
내 부분꿈을 완.성.해.주.어.야.하는
막중한 임무를 가진 아이.
결국 내 결핍을 채워주기 위해서
아이는 그렇게 밥을 열심히
먹어야 했나봅니다.
밥을 먹지 않는 아이가
내 꿈을 완성시키는데 도움을 주지 않으니
아이에게 분노가 나는 거예요.
'너 때문에! 너 때문에!
내 꿈이 다 깨져버렸잖아!!!!!'
이 말을 하고 싶은데,
이 말을 스스로 인정을 할 수가 없으니
화가 나는 거예요.
'밥 잘먹고 건강하게 아이가
자랐으면 좋겠어'라는
그 맘이 거짓이라는 말은 아니예요.
하지만 '아이를 위해서'라는 말,
'너를 위해서'라는 말은
한번쯤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밥을 준비하는 것도,
밥을 차려서 내놓는 것도,
아이에게 밥먹으라고 다그치는 것도,
사실은 모두
'나를 위한 일'
일 뿐입니다.
아이를 위한다면
구지 아이에게 먹으라고
강요할 이유가 없어요.
왜 엄마는 배고프지 않으면,
먹고싶은 음식이 없으면
끼니를 그냥 막 건너뛰면서
왜 아이에게만 밥을 먹으라고
강요하는걸까요?
'나를 위해서'
'내가 밥을 차려주지 않는
나쁜 엄마가 되지 않기 위해서'
'아이가 작은게 내 탓이 되지 않기 위해서'
'아이가 아픈게 내 탓이 되지 않기 위해서'
'내 엄마는 다른 엄마가 되고싶어서'
밥을 차려줄 뿐입니다.
저는 밥 안먹는 아이에게
또 하나의 실수를 했어요.
'니가 원하는걸 가질려면,
다른 하나는 가질 수 없어'라는
메세지를 주었어요.
'니가 원하는 게임을 했으니
너가 원하는 책은
밥 먹을 때 읽어줄 수 없어!!'
라는 메세지를 준 것이예요.
그것이 사랑의 경계라면
또 다른 이야기이겠지만,
저는 '복수의 칼날'을 갈기위해
저 멘트를 협박성으로 사용했어요.
아이에게 '우주'인 엄마가
'니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결국 넌 두개를 다 가질 수 없을거야'라고
메세지를 전한 것이예요.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지려면
'결국 너가 원하는
하나는 포기해야 함'을
세상에 나가기도 전에
아이는 엄마에게서 배워버렸어요.
아무리 '넌 뭐든지 할 수 있어'
라고 아이에게 말해준들
엄마의 심사가 뒤틀려 말해버리는 한마디에
아이는 '무언가를 하기위해선
다른 한가지는 포기해야 함'을...
'두 개를 모두 다 가질 수 없음'이
세상의 이치라고 배워버리네요.
사실은 부모는
자신의 수치심, 자신의 상처에 기반에서
아이에게 '사랑'을 줄 수 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받지 않은 것은
나에게 '미지의 세계'이기에
두렵고, 어렵기 때문이죠.
두렵고 어려운 길로
아이에게 안내하지 않는것이
사실은 그 때 내 의식수준에서는
'사랑'이고 '최선'이였던 거예요.
내가 받지 못한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아이에게 사랑을 주고,
내가 받지 못한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사랑'을 주는 경우가 참 허다해요.
밥을 차려주는 것.
일하는 내 엄마에게
저녁마다 근사한 저녁을
차려받지 못한 저는
매 밥시간이 고통스러워요.
무엇을 해줘야 하는지,
날 닮아 편식하는 것 같은
이 아이를 보면서
매번 식사시간은 제 안에 가진
수치심과 죄책감을
범벅으로 느껴야 하는 시간이기에
참 힘드네요.
그러나 그것은 결국 나의 수치심이기에
아이에게 쓰레기 던지듯
던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느끼고 통과해야할..
홀로 극복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사소한 식사시간 안에도
저의 내면을 보면 일들이 생깁니다.
여러분의 식사시간은 어떠세요?
오늘도 즐거운 저녁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