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나 Oct 18. 2021

죄책감에 깔려 죽을 것 같은 시간들

나는 진짜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해주고 있을까?


둘째를 키우는 것이 첫째와 사뭇 다르다.

첫째를 보면서

'아, 이렇게 키우면 되겠구나'하고

느끼는 감정들이

둘째에서는 머뭇하게 된다.


첫째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아이의 성향 자체도 다르지만

내가 아이를 대하는 육아태도,

마음가짐이 너무 다르다.


둘째는 육아법이라는게 솔직히 없다.

둘째는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다.

둘째는 성향적으로나 상황적으로

엄마의 통제라는 것이 들어먹히질 않는다.


첫째에서 느꼈던 한계에서

(아마도 나의 한계)

더 애쓰고 싶지가 않은 마음이 든다.

영어책, 영어DVD,

책,

그리고 미디어까지.


그토록 애쓰며 잡고 싶었던 것들이

부질없는 것 처럼 느껴지며

그저 흘러가는 상황대로 두게 둔다.


잠자리 독서를 하며

내가 먼저 잠들 때도 많고,

(누가보면 나를 재우는 줄�)


놀아주는게 귀찮아서

첫째때보다 더 노골적으로

도망갈 때도 많다.


그렇게 아이를 키우다보면

가끔은 정말 미친듯이

죄책감이 올라올 때가 있다.

'아, 나 은찬이한테

정말 하나도 해주는게 없네'라고..


그런데 그 죄책감에 빠지지 않으려 한다.

둘째는 둘째의 길로 가고 있을 뿐.

둘째의 인생에

나의 영향력이 지대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여야겠다.


내가 아이들의 인생에

큰 영향을 줄 것이라고 착각하며 살았다.

물론 엄마는 아이들에게 '우주'라고 하지만,

그 우주는 아이를 넓은 관점에서 품어줄 뿐

아이들에게 하나하나 지시하지 않는다.


아이에게 해주는

행위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아이를 바라보는 관점,

아이에 대한 믿음과 사랑,

결국 그것이 다이다.


행위 하나하나에 나를 판단하며 살았다.

이렇게 해주는 엄마는 좋은 엄마,

이렇게 해주지 않는 나는

나쁜 엄마, 게으른 엄마, 못된 엄마.


아이에게 엄마의 행위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님을.

일을 해도, 일을 하지 않아도,

책을 읽어줘도, 읽어주지 않아도,

미디어를 차단해도, 차단하지 않아도

아이를 버릴 수 있다.


나는 아이를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은

내 마음안에 놓고 싶지 않은

어떤 마음이 있다는 의미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아이의 세계'를 존중해주자.

그리고 나는 그 세계에서

내가 할 수 있을 만큼의

'조력자' 역할을 해줘야 겠다.


이 글을 쓰고나니

아이에게 무언가를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죄책감'이라는 감정이 그렇다.

'죄책감'이라는 '거짓감정'은

결국 자기 연민의 감정이이기에

절대 아이를 위한 선택을 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을

측은하게 바라보고

그 감정에 취해있을 뿐이다.


죄책감에서 빠져나와

아이를 위한 선택을 해봐야겠다.

내 아이를 믿고

나를 믿어줘야 겠다.


나에 대한 믿음은 결국

아이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진다.





이전 08화 아이의 일년같은 하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