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나 Oct 18. 2021

완벽하지 하루에 대한 억울함

미숙했지만, 그래도 최선이였다.


자고 있는 둘째가 깰까봐 아빠에게 첫째의 유치원 등원길을 부탁했다. 버스대신 자차로 데려다 주던 시기, 그 적응기간에 구지 둘째를 데리고 원에 데려다 주고 싶지가 않아 아빠에게 부탁한 것이였다. 둘째는 자고 있었고, 조금이라도 더 같이 누워 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런데, 첫째가 단칼에 거절한 것이다. "나는 엄마랑 가고 싶어"


그 말을 듣는데 내가 계획 해 놓은 어떤 것들이 와장창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첫째아이를 아빠가 데려다 주면, 나는 둘째와 무사평탄하게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깨진 것이다. 내 기대와 다르게 생각하는 아이에게 당황스러웠다. 내가 준비한 첫 퍼즐만 완벽하게 맞춰진다면, 조금은 여유로워질 내 하루의 일과가 아이로 하여금 엉망이 될 것 같은 생각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아빠랑 가면 되잖아~~ 왜 안간다는거야!! 너만 아빠랑 등원하면 모든 것이 순조로워지는데..'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니 짜증이 멈추지를 않았다. 아이에게 그 마음을 말로 내뱉고 분노를 내뿜었다. 아이는 그저 엄마와 함께 등원을 하고 싶었을 뿐인데, 아이는 아이대로 자기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엄마에게 서운하고, 나는 나 대로 내 맘 같지 않은 상황에 화가 났다. 사실은 마음을 돌릴 수도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둘째를 키우면서의 고단함이, 내 맘같지 않은 육아의 무력감이, 나 홀로 모든 것을 감내하고 있는 그 억울함이 나를 점점 고집스럽게 만들었다. 


그 순간의 집착. 그 집착이 내 완벽한 하루를 망친 아이에게 미움으로 표현이 되었다. 그렇게라도 표현해야 억울하지 않은 것처럼 느끼게 했다. 내면아이가 튀어나오는 순간이다. 정말 이때 만큼은 서른 몇살의 어른이 아니라, 아이보다 더 어린 고집쟁이 아이가 되어 아이에게 '내 맘대로 하게 해달라고' 박박 우기게 된다.


어른으로서가 아니라, 정말 깽판치는 아이의 마음으로 우긴다. 그리고 그렇게 아이를 상대로 떼를 쓰고 나서야 마음이 가라앉는다. 내 가슴안에 콕 박혔던 묵직한 덩어리가 말로 표현이 되고 나서야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다. 물론 아이에게 이렇게 감정적으로 화를 내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엄마도 사람이다. 사람은 희노애락 모든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며 살아야 한다. 그 팔딱뛰는 감정을 보며 아이도 감정이라는 것을 배운다. 화내야 할 것에 화낼 줄 알고, 참을 수 있는 것에 인내심을 발휘할 줄 알게 된다. 아이는 오히려 화가 폭발할 것 같은 그 감정을 누르는 엄마에게서 더 큰 두려움을 느낀다.


아이에게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감정을 그저 누르는 것도 옳은 것은 아니다.  때론 감정의 표출이 아이와 나를 살린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신이 아닌 사람임을 인정하는 엄마의 솔직함이 엄마도 아이도 살린다. 물론 어른이기에 참을 줄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참을 수 없이 분노가 들끓는다면 어떤 식으로든 그 마음을 달래야 한다. 내 마음이 울고 있는데, 내 마음이 피를 철철 흘리고 울고 있는데 어찌 나 아닌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야려 줄 수 있을까. 내 상태가 그러함을 인정해야 한다. 내가 나부터 먼저 달래 주어야 한다. 아이에게 화를 낸 것은 내가 나를 달래는 가장 최악의 방법이였지만, 그 최악이 가끔은 나와 아이를 살게한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 내 부정적인 마음을 아이에게 표현했다면, 반드시 아이에게 사과라는 것을 해야 한다. 너의 잘못이 아니라, 엄마의 미숙함 때문이라고. 엄마의 문제라고.


그렇게 참을 수 없이 부글부글 하던 내 감정을 표출하고 나서야 등원하고 싶지 않은 아이를 기다려 줄 수 있었다. 어쩌면 아이에게 화를 냈다는 죄책감이, 또 어쩌면 나를 꽉 채우고 있던 어떤 부정적인 감정들을 순간 놓아버렸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 마음에 꽉 차있던 부정적인 감정, 그 감정들을 놓아버리기 시작하니 그제서야 아이의 마음이 보이기 시작한다. 얼마나 엄마랑 가고 싶었을까... 얼마나 엄마의 모습이 무서웠을까..... 그저 사과하는 마음으로 이제는 기꺼이 아이를 기다려 준다. 감정을 표현한 내 마음은 잘못된 것이 아니지만, 아이에게 소리를 지른 그 행동 자체는 미숙한 것이 맞기에. 그 미숙함에 책임지는 마음으로 아이를 기다리고 또 기다려준다. 그리고 결국 아이는 엄마의 마음을 받아주 듯 등원을 결심해준다.


내 소중한 아이에게 화를 내버리고 말았던 그 순간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도 나는 비슷한 선택을 하게 되지 않을까. 어쩔 수 없는 내 최선의 선택. 그렇게 했음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내 최선임을 받아들이는 순간 다음을 선택 할 수 있다. 그렇게 나는 그 미숙함이 나의 최선임을 받아들인 후, 첫째와 둘째를 카시트에 태워 유치원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육아.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흘러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내 마음이 턱턱 막힌다면 그 나름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내 마음을 알아주어야 할 시간이 온것은 아닐까. 아이는 쑥쑥 자라지만, 가끔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엄마의 내면아이는 생떼를 부리고 싶다. 아이가 자라는 속도에 발 맞추지 못해서 헉헉거리고, 화도 냈다가, 분노도 했다가, 자책도 했다가, 눈물도 흘린다. 그리고 때론 나조차도 그런 내가 미워서 다시 나를 비난하게 되는 것 같다. 갈곳 잃은 내면아이. 그렇게 혼자 눈물을 흘린다.


이제는 어른인 내가 그 내면아이를 달래주어야 하지 않을까?

갈 곳 잃은 그 내면아이를 어른이 된 내가 기다려 주어야 하지 않을까?
어릴적 쪼그려앉아 엄마를 기다렸던 그 '어린 나'에게는, 어른이 된 지금의 '나'만이 위로가 될 수 있다.


'많이 지쳤지? 아이들 키우면서 니 맘같지 않아서 많이 힘들고 외롭지? 그래.. 그럼에도 안 미치고 애들 옆에 있어주는 니가 정말 대견스럽다. 니가 존재하는 그 자체로 정말 장하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오늘 하루 완벽하지 않은 자신에 대해 실망하진 않으셨나요? 그럼에도 안미치고 오늘 하루 버틸 수 있었던 던 것만으로도 나는 최선을 다한 거예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기다림으로 육아를 시작하고 끝낸 자신을 스스로 안아주시면 어떨까요? 미친년 지랄발광, 나만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다비슷하다는거. 오늘 하루도 힘내세요.


이전 06화 너하고 미친듯의 떨어지고 싶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