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할 것 같던 시간들이 사라지는 시간
잠에서 깬 둘째가
방에서 혹은 자던 방에서 걸어나오면서
'엄마~~'하며 울지 않은게
두 달정도 된 것 같다.
의식하지 않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그렇다.
아들이 변했다.
그냥 나오면 되지,
왜 그렇게 엄마를 찾냐고.
나를 골탕먹인다고
나를 엿먹인다고
머리로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몸은 자꾸 그렇게 반응해버렸다.
형은 안 그랬는데,
너는 왜 그러냐며.
밖에 나와서 놀고있는 첫째를 보면서
참... 아이를 수도 없이 잡았다.
그런데 아이가 변화했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아이가 왜 그랬는지
한 번에 이해가 된다.
나는 늘 첫째가 일어날 때 같이 일어났다.
내가 옆에 없으면 혹여나 일찍 깰까봐,
조금이라도 육아 시간을
딜레이 시키고 싶은 맘,
그리고 피곤한 맘에
첫째보다 먼저 일어나는게
쉽지가 않았다.
아이옆에 조금이라도 더 자고 싶었고,
하루가 조금이라도
늦게 시작되길 바랬다.
그러니 첫째가 '엄마~~'하면서
자던방에서 나를 부를일이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니
아이가 하나였을 때의
나를 떠올리지 못하고
그저 아이가 내 맘 같지 않다고
막연히 형은 그러지 않았다고
비교하며 아이를 탓했던 것 같다.
나의 상황도
아이의 상황도
달랐는데
그 달라진 상황은 보지 못하고
그저 내 귀찮음에 빠져 있었다.
일어났을 때
엄마가 함께 누워있는그 안정감을
아이는 얼마나 필요로 했을까?
일어났으면 그냥 혼자 쫌 나오라고
너 나올 수 있지 않느냐고,
매번 숨막히는 얼굴로 다가가
소리쳤던 나를 보며
아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나를 바라보고 키우는 것과
둘을 동시에 케어해야 하는 상황은
참 다르다.
하나일 때 당연했던 것들이
둘이 될 땐
어쩔 수 없이 놓치는 부분이 있다.
(물론 하나였을 때도 이 지점이 화가 났다.
그 땐 그냥 포기하고 아에 아이 옆에 누워있었다)
그 달라진 상황을 깨닫지 못한다면
수용하지 못하고 아이를 탓한다면
미친년 칼춤은
어쩔 수 없는 코스이다.
엄한 애만 쳐잡고
나는 자괴감에 빠진다.
아, 그래도
이제라도 볼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라고 나를 위로해 본다.
그저 내 힘듦에 빠져서
둘째의 마음을
보지 헤아리지 못했음을
둘째에게 고백하고
사과해야 겠다.
언제까지 아이가 나를
'엄마~~~'하고
애타게 불러줄까?
아이말고 또 누가
나를 그렇게 애타게 불러줄까?
영원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그 순간 이성이 마비된다면
그 지점은
내가 내 부모에게 받지 못한
상처지점입니다.
나를 애타게 불러줘서 고맙다.
나를 그렇게 애 타게 찾아줘서 고맙다.
엄마가 더 잘할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