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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 Oct 19. 2021

엄마~~하면서 방에서 울지 않고 나오기 시작했다

영원할 것 같던 시간들이 사라지는 시간


잠에서 깬 둘째가

방에서 혹은 자던 방에서 걸어나오면서

'엄마~~'하며 울지 않은게

두 달정도 된 것 같다.

의식하지 않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그렇다.

아들이 변했다.

그냥 나오면 되지,

왜 그렇게 엄마를 찾냐고.

나를 골탕먹인다고

나를 엿먹인다고

머리로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몸은 자꾸 그렇게 반응해버렸다.

형은 안 그랬는데,

너는 왜 그러냐며.

밖에 나와서 놀고있는 첫째를 보면서

참... 아이를 수도 없이 잡았다.


그런데 아이가 변화했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아이가 왜 그랬는지

한 번에 이해가 된다.


나는 늘 첫째가 일어날 때 같이 일어났다.

내가 옆에 없으면 혹여나 일찍 깰까봐,

조금이라도 육아 시간을

딜레이 시키고 싶은 맘,

그리고 피곤한 맘에

첫째보다 먼저 일어나는게

쉽지가 않았다.


아이옆에 조금이라도 더 자고 싶었고,

하루가 조금이라도

늦게 시작되길 바랬다.


그러니 첫째가 '엄마~~'하면서 

자던방에서 나를 부를일이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니

아이가 하나였을 때의

나를 떠올리지 못하고

그저 아이가 내 맘 같지 않다고

막연히 형은 그러지 않았다고

비교하며 아이를 탓했던 것 같다.


나의 상황도

아이의 상황도

달랐는데

그 달라진 상황은 보지 못하고

그저 내 귀찮음에 빠져 있었다.


일어났을 때 

엄마가 함께 누워있는그 안정감을 

아이는 얼마나 필요로 했을까?


일어났으면 그냥 혼자 쫌 나오라고

너 나올 수 있지 않느냐고,

매번 숨막히는 얼굴로 다가가

소리쳤던 나를 보며

아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나를 바라보고 키우는 것과

둘을 동시에 케어해야 하는 상황은

참 다르다.


하나일 때 당연했던 것들이

둘이 될 땐

어쩔 수 없이 놓치는 부분이 있다.

(물론 하나였을 때도 이 지점이 화가 났다.

그 땐 그냥 포기하고 아에 아이 옆에 누워있었다)


그 달라진 상황을 깨닫지 못한다면

수용하지 못하고 아이를 탓한다면

미친년 칼춤은

어쩔 수 없는 코스이다.

엄한 애만 쳐잡고

나는 자괴감에 빠진다.

아, 그래도

이제라도 볼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라고 나를 위로해 본다.


그저 내 힘듦에 빠져서 

둘째의 마음을

보지 헤아리지 못했음을

둘째에게 고백하고

사과해야 겠다.


언제까지 아이가 나를

'엄마~~~'하고 

애타게 불러줄까?

아이말고 또 누가

나를 그렇게 애타게 불러줄까?


영원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그 순간 이성이 마비된다면

그 지점은 

내가 내 부모에게 받지 못한

상처지점입니다.


나를 애타게 불러줘서 고맙다.

나를 그렇게 애 타게 찾아줘서 고맙다.

엄마가 더 잘할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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