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한 엄마의 공감, 엄마도 몰라서 그랬구나
아이를 낳자마자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그곳에서 터를 잡은 고모가 있다. 그리고 그 고모의 딸이 결혼을 했다. 구지 고종사촌이 결혼하는데 돈을 보내야 되나 싶었지만 엄마는 결혼한 언니라면 챙겨주는게 맞지 않냐는 말로 축의금을 내셨으면 했고, 구지 실랑이 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어느정도의 마음을 표현했다. 내게는 어린 시절에 가장 설레이고 즐거웠던 기억 중 하나가 시골에 머물렀던 고종사촌을 보러가는 일이기도 했으니깐. 그냥 미국에 산다는 것 만으로도 내게는 자랑스러운 고모였고, 또 때론 동경의 대상이였던 고모였고 그런 고모의 자식들이였기에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아이들 같았고 그렇게 어쩌면 내게는 동경의 대상, 부러움의 대상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얼마 되지 않은 돈을 부조를 했는데 고모가 카카오톡으로 전화가 왔다. 내게는 동경의 대상이였던 고모. 그 고모에게 온 전화가 생소하면서도 왜 그렇게 낯선지. 그런데 괜히 참 설레였다. 고모랑 통화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이유도 모르게 설레였다. 시간이 맞지 않아 두번만에 연결된 통화였다. 고모랑 통화를 하며 어색함을 숨기며 종알 종알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러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통화 막바지에 '어린시절'의 이야기가 나왔다. 물론 내가 꺼낸것이였다. 나는 그 어린시절의 기억이 참 좋았으므로.
그런데 대뜸 고모가 어린시절의 이야기를 꺼내니 생각난다며 나의 치부를 꺼내는데 순간 민망함이 올라온다. '너가 OO 손톱 깎아주다가 피나게 했잖아. 내가 막 소리를 지르니깐 너가 할아버지한테 쫒아가서 고모가 소리질렀다고 그랬잖아' 라는 말을 듣는데 왜 그렇게 부끄럽고 또 한편으론 왜 구지 좋은 통화에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가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애써 민망함을 감추며 잘 연결되지 않은 카카오톡 전화를 끊으면서 '결국 남이구나'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는 고모에게 무엇을 기대한걸까 싶은 마음.
물론 입장 바꾸어 보면 이해되지 못할 일도 아니지만, 뭔가 나 자신에 대해 이미 고모가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음이 느껴지기에 더 화가 나고 서운했던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나에게 화내는 고모를 피해 할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한 일은 아이로서 어쩌면 칭찬받아야 할 일 아닌가 하는 생각도 올라왔다. 나를 지켜줄 누군가를 찾아간 것, 다른 왜곡되지 않은 거울이 나를 비추어 줬다면 고모처럼 말하지 않았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내게 연민 비슷한 감정도 올라왔다. 늘 그렇게 누군가의 비난이 익숙했을 내 어린 시절에 대한 연민. 잘한점, 좋은 점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기 보다는 늘 부족한 점에 대해서 지적 받았던 나에 대한 연민. 그리고 이 글을 쓰면서 나 역시 아이에게 그러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반성이 올라온다.
설레였던 고모와의 전화통화. 그리고 결국 자기 비난으로 끝나버린 전화통화. 정말 미국 한 번 초대해주지 않았던 고모였고 어린시절 몇달 잠깐 마주한 것이 다였던 고종사촌이였고, 얼마 안되는 돈 이였지만 축의금 낸 것 조차 아깝다는 마음이 올라왔다. 사랑받지 못한 것에 대한 한풀이랄까. 아, 결국 나혼자 설레고 좋아했구나 싶은 억울함이랄까. 돈주고 뺨맞은 것 같은 기분이였다.
늦은밤의 통화라 그 쓰린 마음을 안고 잠을 자는데 또 내가 '이상한'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화가 한 가득 내 마음에 차 있는 것 같고, 내가 이상하게 보인 건 아닐까, 실수한 건 아닐까 하는 나를 믿지 못하는 마음이 다시 올라왔다. 익숙하게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그 시간이 다시 시작된 느낌이였다. 어쩌면 고모를 통해 잠깐 느낀 감정이였지만, 내 어린시절 나를 비추어주었던 사람들은 다 고모같은 사람이 아니였을까 싶다. 나의 부족한 부분만을 구지 아는 채 해주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 경험들이 하나하나 쌓이면서 나를 '부정'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그렇게 여러 복잡한 마음에 잠이들고 아침에 눈 뜨자 마자 엄마에게 전화 통화를 했다. 고모한테 간 축의금이 도대체 얼마나 되었는지 궁금한 마음이 컸다. 구지 엄마 때문에 축의금까지 냈는데 내가 고모한테 아쉬운 소리를 들어야 되냐고 따지고 싶은 마음도 컸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머리로는 비난이 아닌 지난 시간에 대한 회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서운한 마음은 잘 사라지지가 않았다. 고모에게 이해받고 사랑받고 싶은 그 마음이 참 컸기에 구지 들어야 했던 그 소리에 대한 서운함이 컸다.
엄마와 이야기하면서 나의 마음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엄마가 했던 말. '우리 가족이 A형이잖니', '예전 이야기가 생각이 났나보지'.... 내 감정과 상관없이 상황을 정리하는 말들을 엄마가 하신다. 그런데 그 와중에 꽂히는 말 한 마디를 건네는데 '와- 우리엄마 정말 많이 변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지명아 많이 서운했제?'. 그 말을 듣는데 고모한테 사랑받고 싶었지만 좌절했던 마음, 그리고 서운했던 마음이 일순간에 와르륵 무너지는 것이 느껴진다. 엄마가 나의 감정을 알아주는구나. 엄마가 나의 서운한 마음을 알아준다고 느끼는 순간 고모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신기하게도 하나도 들지가 않았다. 엄마가 내편이구나... 엄마가 나를 알아준다는 것 만으로 아무런 생각이 들지가 않았다.
분명 고모한테 사랑받고 싶었는데, 사랑받지 못해서 화내고 열내고 돈이 아깝고 그러한 마음에 자꾸만 스스로 치사하게 느껴질 만큼 쪼잔해 지고 있었는데 엄마가 '그래 많이 서운했제?'하는 순간 서운함이 사라졌다. '와- 엄마 우리 엄마 교육시킨 보람이 있네'라는 말이 나도 튀어나온다.
엄마에게 공감받고 싶어 싸웠던 지난 7년간의 세월이 있었다. '지명아 많이 힘들었제? 엄마가 미안하다'라는 말이 듣고 싶어 투쟁했던 시간이 7년이였다.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은 변명이나 상황종결이 아니라 그냥 내가 힘들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하는 엄마의 '사과와 위로'의 말 한마디였는데 그 말을 듣지 못하니 계속 엄한 곳에 가서 위로받고 공감받으려 애썼다. 그런데 엄마의 '공감', '지명아 많이 서운했제?'한마디가 모든 것을 불식시키는 느낌을 받는다. 아님을 머리로는 알고,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으로 이해되지 않았던 것들이 한 순간에 이해가 되어버리는 느낌.
'엄마, 나 엄마가 공감해주니깐 이제 괜찮아. 정말 신기하게 아무렇지도 않아. 그리고 엄마가 공감해주고 나니 고모가 이해가 돼. 나도 친정이랑 시댁이랑 다 떨어져서 살다보니 우리가족,, 이런게 있어. 우리 가족끼리 똘똘 뭉치고 우리가족에 누가 들어오는게 싫고 그런게 있더라고. 하물며 고모는 타지역도 아니고 다른 나라에서 살고 있는데, 가족이 얼마나 소중하겠어. 고모가 선웅이 피나는게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이해가 저절로 되네. 엄마 고마워'
내가 엄마에게 전화했던 이유가 축의금 금액이 궁금해서, 또 고모에게 서운했던 마음을 토로하며 괜히 축의금을 내게 한 엄마를 원망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내가 전화한 이유는 상처받은 내 마음을 엄마가 이해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라는 사실을 '엄마의 공감'을 듣고는 알았다. 원망하고 탓하고, 부정하고 비난하기 위해 엄마에게 연결한 것 한 줄 알았는데, 사실은 '엄마 나 이만큼 아팠어요. 나 너무 서운했어요'를 말하고 그 마음에 공감받고 싶었구나!
엄마의 공감한마디에 내가 스스로 쌓았던 불신의 벽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그 경험이 너무 소름끼치고 황홀하게 느껴졌다. 우리 엄마의 공감 한마디가 나를 살리는 구나. 우리 둘째가 자신의 욕구를 몸으로, 소리로 강하게 표출할 때 나는 쟤가 왜 저러나 싶어 쳐다보고 때로는 소리지르곤 했는데, 어쩌면 둘째가 원했던 것도 엄마가 내게 해주었던 공감과 이해가 아니였을까 싶다.
공감. 받아본 사람이 공감한다더니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내가 공감받아보니, 공감이라는게 참 좋은 것이라는 것을 더 명확하게 알 것 같다.
상대가 나에게 어려움을 토로할 때, 나는 해결해주고 그 감정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다. 상대 또한 그런 것을 바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공감 받아보니 알겠다. 그냥 내 마음을 알아차려주고 그것을 타인의 언어로 나를 이해해주면 된다는 것을. 진짜 바라는 것은 사실 '너를 이해하고 있어'라는 신호라는 사실을.
내가 나를 믿지 못하고, 내가 나를 보호하지 못해 팔짝팔짝 뛰고 있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내가 너를 이해하고 있어. 많이 힘들었지?'라는 공감이라는 사실을 엄마의 공감을 통해 더 확실히 배우게 된 것 같다.
'엄마'의 공감은 아이에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경험이자 자산이라는 생각이 든다. 평생 누군가에게 사랑이 받고 싶어 헤매이고 있다면 그것은 엄마에게 받은 공감의 양이 부족해서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것을 엄마가 해줄 수 있다면 더 없이 좋겠지만 실상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거의 8년만에 엄마의 공감을 듣지 않았나. 결국 내가 나를 공감해주며 엄마의 공감을 기다려야 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당장 공감해줄수 없는 엄마를 붙잡고 참 많은 원망과 화를 쏟아냈지만 그 땐 받을 수 없던 공감이였다. 그런데 내가 나를 바라보고 지지해주고 믿어주니 엄마도 나를 공감해주고 받아주기 시작한다. '엄마에게 공감이 받고 싶어. 엄마가 힘들었냐고 말만 해주면 돼'라고 지난 몇개월 전에 이야기했을 때, '아, 그런거였어? 그런거면 해줄 수 있지'라고 감을 잡은 엄마의 모습이 글을 쓰는데 스쳐지나간다.
'공감'받지 못했던 엄마의 삶에서 나를 '공감'해주기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식을 위해 못할 게 없다는 엄마의 말처럼,,, 몸에,,, 그리고 뇌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떤 '공감'이라는 프로세스를 '자식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엄마가 일구어냈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의 공감을 듣고 내가 했던 말. '엄마 오래 살아'. 엄마가를 품이, 힘들 때 찾을 수 있는 엄마라는 안전지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하고 행복한 일인지를 이제서야 조금씩 느끼며 깨달아 가게 되는 것 같다.
엄마도 몰라서 그랬다,,,,는 그 말이 내 마음에, 나의 뇌리에 꽂힌 날. 그리고 엄마도 충분히 변할 수 있구나를 몸소 체험한 날. 엄마가 내 마음을 알아주는 순간 나는 무서울 것도, 두려울 것도, 서운 한 것도 어느 하나 잡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냥 '엄마'가 내 편이라는 사실 하나 만으로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구나. 그만큼 '엄마'라는 존재가 아이에게 중요하고 위대한 존재라는 것을 몸소 느낄 수 있는 좋은 시간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