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울증 약과 친해지는 중
병원에 다닌지 한달이 넘어간다.
심리 상담도 3회차를 마쳤다.
약은 종류와 용량을 바꿔가며 적응 중이다.
지난 주에 항우울제 용량을 조금 늘렸었는데,
지난 1월 고양이를 보낸 후 찾아왔었던 불안 증상이 잦아져서
지금은 항우울제를 줄이고 불안도를 낮춰주는 약 용량을 늘린 상태다.
신기하게도 우울의 체감은 늘었고, 불안의 빈도는 현저히 낮아졌다.
정신과 약을 먹는다는 건 적은 용량에도 귀신처럼 바뀌는 몸과 마음 상태를 확인한다는 점에서
재밌다는 생각마저 아주 가끔 든다.
항우울제를 다시 조금 늘리니, 일주일 내내 울다 오늘 하루는 안 울고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2.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운동과 1도 친하지 않았던 나는 생존을 위해 헬스를 배워 꽤 오래 했었고
그러다 테니스를 시작하며 궁극의 재미를 맛보았었다.
그러다 지난 10월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운동을 멈추었는데 그 뒤로 연쇄적으로 일어난 일들이
참으로 가혹했다.
고양이를 보냈고, 회사 월급이 밀려 퇴사하게 되었으니까.
국가로부터 간이대지급금을 받았다.
전혀 알고 싶지 않았던, 경험한 적 없었던 일들을 처리하는 과정의 결과로.
실업급여와 간이대지급금. 그 돈으로 병원도 가고, 테니스도 등록했다.
테니스 라켓은 거의 10개월만에 다시 잡았는데, 정말 놀라웠다.
첫 레슨부터 너무 재밌었거든.
테니스가 그런 운동이다. 운동치, 몸치도 미치게 만드는 매력.
하지만 지금의 내 체력은 바닥을 뚫고 땅 밑으로 꺼진 상태이기 때문에
레슨 10분도 안돼 소나기처럼 땀을 흘리며 코치님께 SOS를 보낸다.
그럼에도 라켓으로 공을 맞힐 때 나는 소리, 그 타격감이 궁극의 도파민으로 작용한다.
새로 등록한 테니스장에는 유산소 머신들이 있기에, 체력증진을 위해 가끔 유산소 머신을 타기도 하고
집 근처에 등록해놓고 기부만 하고 있었던 헬스장도 다시 나가기 시작했다.
몸이 정신을 살리고, 정신이 몸을 살리겠지.
3. 치료 중이라는 인식
나는 지금 우울증을 치료하고 있는 단계이다. 아픈 것이지, 이상한 게 아니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다시 일을 하게 되고, 운동도 하고, 그럼 괜찮아질까?
잘 모르겠는데...?
지금 상태로는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나이도, 환경도, 많은 것들이 바뀌었으니까.
예전의 나로 돌아가는게 아니라, 지금의 나로 익숙해져야겠지.
사는게 참 지난한데, 또 새롭다.
4. 가능성을 닫아두기
내가 좋아하는 이동진 평론가님께서 어른에 대한 키워드를 얘기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더라.
저는 가능성이 줄어들어서 너무 좋아요. 어렸을 때일 때는 가능성이 많은게 기회의 바다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선택하는게 무섭고 어렵기도 했거든요. 내가 A로 가지 않고 B로 갔다, 라고 한다면 내가 제대로 선택하는 건가부터 시작하잖아요. 지금은 약간 맡기게 되거든요. 실제로 제 인생에서 아마 남은 인생 동안 더 드라마틱하게 바뀔 수도 있겠지만 제가 여태까지 살아왔던 과정 속에서 변화가 더 많겠지요.
가능성이 줄어들어서 너무 행복한 부분도 있어요. 사실은 몇 개 좁혀진 길들만 편안하게, 때로는 길이 없기도 해요. 아, 여기 없네. 안 가면 되잖아. 옛날에는 갔다니까. 가다가 막 부딪히고 막 이랬단 말이야. 근데 요즘은 아, 길이 없네. 아 그럼 안 가지를 알아. 인생이 이런 거거든요. 저런 가능성이 적은게 개인적으로는 요즘 좋게 느껴지기도 해요.
30대의 나는 영화를 벗어나서 새로운 곳으로 가보고 싶었고, 가보기도 했었다.
다시 업계로 돌아와 시간이 흐르고, 지금의 나는 '이 일이 아니면 안된다'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큰 변화다.
어쩌면 체념이고, 어쩌면 집중이다.
노력해도 분산돼버리는 생각과 파도처럼 덮쳐오는 눈물 속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을 그냥 하자-라는 마음으로.
조금씩 노력하고 있다.
어젯밤은 30분을 넘게 울다 잤지만, 오늘은 잘 잠들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