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고객은 누구인가?
창업자를 돕는다고 말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액셀러레이터로서 진짜 고객이 누구인지를 묻는 순간,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공식적으로 액셀러레이터의 고객은 창업자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의 운영비 대부분은 정부 지원금이나 기업 협력 예산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우리의 고객은 창업자가 아니라, 보고서를 받아보는 정부 기관일까? 아니면 CSR 효과를 노리는 기업일까?
이 모순은 액셀러레이터 생태계 전반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창업자에게는 “우리가 당신의 성장을 돕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제 성과 지표는 “정부가 요구하는 KPI”나 “후원사가 원하는 홍보효과”일 때가 많다. 창업자의 눈에는 액셀러레이터가 마치 자신을 위한 존재인 것처럼 보이지만, 뒤에서는 전혀 다른 고객을 위해 일하고 있는 셈이다.
고객 정의가 모호할 때 가장 큰 피해자는 창업자다.
창업자가 원하는 것은 간단하다. 첫 고객을 만나고, 투자자를 설득하고, 제품을 시장에서 검증하는 일이다. 하지만 액셀러레이터의 고객이 기관이나 후원사로 바뀌는 순간, 창업자가 필요로 하는 가치가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 프로그램은 형식적 이벤트로 채워지고, 멘토링은 단순 인력풀 소집으로 끝난다. 창업자가 겪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액셀러레이터는 KPI 달성에만 몰두한다.
나는 이 구조 속에서 늘 불편함을 느껴왔다. 창업자가 고객이라고 말하면서 정작 창업자의 목소리를 진지하게 듣고 있는가? 프로그램을 설계할 때, 보고서용 숫자보다 창업자의 실제 필요를 중심에 놓고 있는가?
그렇다면 진짜 고객은 누구인가. 나는 이 질문에 대해 이렇게 정리한다.
1차 고객은 창업자다.
2차 고객은 투자자와 기관이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우선되어야 할 고객은 언제나 창업자다.
이 정의는 단순한 이상론이 아니다. 창업자가 성장해야만 투자자도 수익을 얻고, 기관도 정책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창업자가 실패하는데 액셀러레이터가 성과를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고객 정의는 언제나 창업자 중심으로 돌아와야 한다.
문제는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 나는 다음과 같은 원칙을 실천하려 한다.
창업자 인터뷰를 제도화한다. 모든 프로그램 설계 전에 창업자와 직접 인터뷰를 하고, 그들의 언어로 필요를 기록한다.
고객 여정 지도를 만든다. 창업자가 액셀러레이터를 통해 겪는 경험을 여정으로 설계하고, 그 과정에서 느낄 가치와 불편을 구체적으로 짚는다.
고객 중심 KPI를 세운다. 정부 보고용 숫자 대신, 창업자가 실제 변곡점을 통과했는가를 지표로 삼는다. 예를 들어 ‘후속 투자 유치’, ‘첫 매출 발생’, ‘PMF 검증’ 같은 지표다.
고객의 목소리를 공유한다. 창업자 피드백을 정기적으로 팀과 공유하고, 프로그램 개선에 반영한다.
고객을 명확히 정의하면 액셀러레이터의 모든 의사결정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창업자가 첫 고객을 만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라면, 액셀러레이터는 화려한 데모데이보다 실제 고객 연결 네트워크에 더 많은 자원을 투자하게 된다. 기관 보고를 위해 50팀을 모집하는 대신, 창업자가 성장할 수 있는 10팀만 집중 지원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게 된다.
나는 이 원칙이 액셀러레이터 생존의 첫 단추라고 생각한다. 고객을 잘못 정의하면 프로그램 전체가 공허해진다. 하지만 고객을 정확히 정의하고 창업자의 변곡점을 중심에 두면, 액셀러레이터는 숫자가 아니라 신뢰로 살아남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지금 누구를 고객으로 삼고 있는가?”
“창업자의 변곡점을 만들어주고 있는가, 아니면 보고서용 숫자를 채우고 있는가?”
정직하게 답할 수 있을 때, 나는 비로소 작은 액셀러레이터 대표로서 본질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