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공간, 회센터
수하의 엄마는 싱글맘이다. 그것도 홀로 지방의 작은 도시 속초에서 혼혈 아이를 낳아 기르는, 강단 있는 여성이다. 엄마의 고향이 속초인지, 아니면 젊은 시절에 정착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수하가 대학을 갓 졸업한 20대 초중반 나이가 될 때까지, 엄마는 속초에서 살아왔다.
엄마는 생선을 다듬어 파는 일을 하는데, 책을 보며 상상했던 엄마의 가게는 중앙시장 어물전의 좌판이었다. 속초 중앙시장의 어물전에서 파는 수산물은 수조가 아니라 좌판 가득 깔린 얼음 위에 올라가 있다. 오늘 아침까지 살아있었던 오징어며 물가자미, 물곰, 골뱅이는 물론, 생물이 귀할 땐 노르웨이산 자반고등어도 판다. 겨울엔 양미리와 도루묵이 있다. 하루가 끝날 즈음 좌판 옆 들통에는 하루 종일 손질한 생선의 부산물이 가득 들어찬다.
책에서 엄마는 부두 하역장에 딸린 작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고 나온다. 하지만 속초에 주거 공간이 있을만한 부두 하역장은 없다. 닭강정이 유명한 중앙시장에 상가아파트가 있다고는 들었는데, 거기도 워낙에 지은 지 오래되어 실제로 거주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주변에 새로 생긴 아파트로 이사한 경우가 많다.
속초 이마트에서 아바이마을로 가다 보면 청초호에 접해있는 큰 수협 건물이 보인다. 아침 일찍 여기서 수산물 경매가 열린다. 또 동명항에서도 경매가 열린다고 알고 있다. ‘부두 하역장’이라는 말을 붙이려면 주문진이나 묵호, 부산 정도로 항구 규모가 큰 곳이어야 할 것 같다.
영화에선 엄마가 일하는 곳이, 배가 정박되어 있는 항구 한편에 마련된 활어회 센터로 나온다. 앞바다에서 잡아온 생물로 회나 매운탕을 끓여 파는 가게들이 모여있는, 우리가 흔히 보아온 모습이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묘사된 엄마의 일하는 모습이 조금 어색하다. 바쁘게 몰려드는 손님들에게 이것저것 싸서 금방 건네주는 식으로 일하는데, 어물전에서 생선을 토막 내 싸주거나, 건어물에서 젓갈을 봉지에 담아 건네는 것과 비슷하다. 회센터라면 “사장님 식사하시고 가세요~ 잘해드릴게!”라는 호객 행위가 있을 것이고, 엄마는 수조에서 산대(뜰채)로 우럭이나 광어를 잡아 올려 회를 뜰 텐데. 또 엄마의 특기인 복어회를 주문한 단골손님을 위해, 집중해서 복어 손질을 하겠지. 그런 장면이 더 잘 어울렸을 것 같다.
영화 속 회센터의 모습을 바로 알아보진 못해도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속초가 아니라면 고성이나 양양의 작은 항구가 아닐까 생각하며, 짐작 가는 곳에 가보기로 했다.
그전에, 엄마가 수하를 낳기 전 아빠와 만났을 무렵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엄마가 아빠랑
데이트했을법한 장소들
지금의 ‘청초수 물회’가 있는 자리에, 내가 어렸을 때는 작은 놀이공원이 있었다. 영화에서 수하가 짚은 곳은 시외터미널 근처이지만, 실제로는 엑스포장 끄트머리에 있었다.
작가 엘리자 수아 뒤사팽은 내 또래이고, 주인공 수하에게 자신을 투영시켜 표현했다고 한다. 영화는 소설이 나온 지 10년 정도 뒤에 개봉했지만, 소설 속 주인공은 나에게도 익숙한 시공간을 경험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책과 영화를 볼 때, 내가 저 시기에 이곳저곳을 다녔을 때 수하도 어딘가에 있었겠구나 생각하게 됐다.
엑스포장의 작은 놀이공원에는 바이킹과 디스코팡팡, 회전목마가 있었다. 그 회전목마는 아직도 청초수 물회 1층 카페 한편에 남아있다. 그래서 카페 이름도 ‘메리 고 라운드(회전목마)’다.
주인공 수하의 나이는 24~25살 정도로 보인다. 작가가 92년생이니, 책이 나온 2016년 기준으로 작가의 나이도 그 정도였을 것이다. 영화가 나온 2025년 기준으로는 수하가 2000년생 정도가 아닐까. 대학을 갓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와 펜션에서 일하고 있다는 설정이니까.
그렇다면 엄마는 70년대생 정도가 되었을 것 같다. 20대 중반 정도의 나이에 엄마는 속초를 찾아온 프랑스인 아빠를 만나, 엑스포장에서 바이킹도 타고, 유람선도 타지 않았을까?
사진 속의 배는 청초수 물회 근처에 아직 남아있는 엑스포 유람선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타 본 것이 고등학생 때였고, 지금은 운행하지 않는다. 요즘은 요트 체험장이 생겨서, 주로 그걸 타고 앞바다 유람을 한다.
예전엔 7천 원인가 하는 승선료를 내고 유람선을 타는 일이 신나는 나들이였다. 바다 앞 조도를 한 바퀴 돌고 돌아오는 동안, 매점에서 산 새우깡을 갈매기에게 주는 것도 재미있었다.
지금은 네이버로 요트 체험을 예약하고, 분위기 좋은 노래를 들으며 앞바다까지 갔다 올 수 있다. 해 질 무렵에 타면 돌아올 때 설악산 너머로 저무는 노을이 보여서 더 좋다.
사진 속 장소는 청초호에 접해있는 엑스포 공원 데크다. 1999년에 여기서 관광 엑스포가 열렸다. 그 준비과정에서 호수 주변의 땅을 매립해 부지를 조성했다. 어쩌면 수하 엄마와 아빠는 99년 엑스포를 구경하며 데이트했을지도 모른다.
엄마의 일터/ 회센터
이제 엄마가 일하는 가게 이야기를 해보자.
영화가 시작되면, 수하는 남자친구의 오토바이 뒤에 타고 엄마의 가게에 간다. 그곳에서 엄마에게 새끼 문어가 든 아이스박스를 건네받고, 일하는 펜션으로 향한다. 눈 쌓인 모래사장 위를 걸어가는 장면 위로, 이 영화의 제목 <Hiver a sokcho>가 나타난다. 이 바닷가는 속초해변에 연결된 외옹치해변이다.
대관람차 ‘속초아이’가 있는 속초해변에서 바다를 왼편에 두고 남쪽을 바라본다. 정면 해안절벽 위에 롯데리조트가 있다.
‘롯데리조트 속초’가 지어진 해안절벽이 외옹치라는 곳이고, 리조트를 기준으로 왼편에 외옹치 해변, 오른편에 외옹치항이 있다. 외옹치해변에서 출발해, 해안절벽 아래 데크를 따라 외옹치항까지 걷는 산책로가 있는데, ‘바다향기로’라는 곳이다.
2018년 초 평창올림픽에 맞춰 롯데리조트가 개장했다. 바다향기로가 위치한 곳은 원래 군인만 출입 가능한 순찰구역이었는데, 리조트 개발의 조건으로 이곳을 공공을 위한 산책로로 만들게 된 것이다. 수하가 아이스박스를 들고 외옹치 해변을 걸어가는 장면으로 미루어보아, 처음엔 엄마의 가게가 외옹치항이 아닐까 생각했다. 엄마가 거주하는 동네도 근처 새마을 같았으니까.
그런데 영화를 몇 번 보면서 엄마가게의 특징을 몇 가지 발견할 수 있었다.
주변 가게 중에 <호섭이네>라는 간판이 보였다.
그 옆에 <화진 이모네(추측)>도 있었던 것 같다.(여기서 ‘화진’은 고성의 화진포에서 따옴)
엄마 가게는 <속초 엄마네(추측)>같은 이름이었는데, 간판이 묘하게 다른 집과 달랐다. 소품 같은 느낌.
가게와 마주 보는 곳에 식사를 할 수 있는 포장마차가 있고, 그 너머에 어선이 정박된 항구가 있다.
가게와 정박된 어선 사이에 포장마차가 있는, 그런 구조의 회센터를 찾아보기로 했다.
후보 1)
이마트 앞
아바이 활어회센터
프랑스인 여행자 얀 케랑은 스마트폰으로 구글맵도 찾아볼 줄 모르는 것 같고, 수하가 만드는 숙소 식사도 먹지 않는다. 그러다 수하의 제안으로 회센터 포장마차에 같이 밥을 먹으러 간다. 매운탕과 회를 주문했는데, 익숙하지 않은 얀 케랑은 스끼다시로 나온 오이와 당근만 집어 먹는다. 서툰 젓가락질로.
처음 가게에 들어설 때의 분위기나, 사장님이 수하를 대하는 태도로 미루어보아, 여기는 엄마의 가게가 속한 회센터 같다. 엄마의 이웃 가게에 온 듯하다. 카메라 앵글이 포장마차 바깥에서 두 사람을 따라가며 움직이다가, 한 포장마차 앞에서 멈춘다. 여러 가게의 각기 다른 포장마차를 바깥에서 훑다가,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면, 카메라 앵글이 실내로 이동한다.
이마트에 다녀오는 길에 보니, 가만있자... 여기랑 느낌이 비슷한데?
포장마차 너머에서 촤르르 넘어가는 앵글로 찍으려면, 바깥에 레일을 설치하고 수평으로 찍을만한 공간이 필요하다. 괜찮긴 한데, 이쪽에 있어야 할 바다와 어선이 여기엔 없다. 물론 여러 장소에서 촬영해 합쳐서 하나의 공간처럼 보이게 한 것이지만, 이왕이면 처음 영화에 등장한 그 장소를 찾고 싶었다.
후보 2)
동명항
어느 날은 영금정 근처에 갔다가 동명항이 눈에 띄었다. 회센터와 항구가 모두 있는 곳이다.
하지만 이곳은 가게와 마주 보는 포장마차가 아니라, 1층에서 산 생선을 2층 초장집에서 요리해 주는 구조다.
혹시나 싶어 영화와 비슷한 구도를 찾아왔는데, 어구를 보관하는 창고와 배가 정박해 있는 곳 사이가 너무 좁다. 영화를 위해 임시로라도 포장마차를 만들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여긴 어떨까?
후보 3)
설악항
속초시와 양양군 사이, 설악산에서 흘러와 바다까지 이어지는 ‘쌍천’ 옆에, ‘설악항’이라는 곳이 있다.
마음속으로 짐작만 하다가, 어느 날 <보사노바>를 출발해 ‘설악항’까지 걸어가 보기로 했다.
<보사노바>를 나와 외옹치항 방향으로 걸었다.
바닷가로 가서 ‘바다향기로’를 걸어도 좋지만, 겨울에 휴업 중이라 이쪽 길로 갔다.
언덕을 넘으면 외옹치항이 나오고, 그다음이 대포항이다. 앞에 커다란 숙소가 보이는데 여기가 바로
그 너머에 보이는 숙소는
<롯데 리조트 속초>에 가려면 바다향기로를 산책하다가 연결된 계단을 올라가도 되고, 보통은 이쪽 정문으로 들어간다. 해안 절벽 위에 있기 때문에, 어디에서 출발해도 경사가 있다.
여기로 내려가면 외옹치항이다.
엄마 가게의 후보 중 하나였는데, 가게와 정박된 어선 사이에 포장마차가 없어서 제외했다.
물이 이렇게 맑다.
카시아 리조트는 롯데리조트와 가격대가 비슷하거나 조금 더 비싸다. 속초 전체에서 꼽아봐도 가격대가 높은 편이다.
대포항 회센터 앞까지 왔다. 사진에 보이는 다리를 건너면, 설악항까지 가기가 좀 더 빠르다.
다리로 향했다.
빠르기도 하지만, 풍경도 멋지다.
예전에 난전이 있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의 대포항. 예전이 더 낫다는 아쉬움 섞인 말을 종종 듣는다.
대포항 주차장을 지났다. 여름 성수기에도 빈자리가 많은, 아주 넓은 주차장이다. 카시아 리조트가 세워진 곳도 전에는 이런 주차장이었다.
대포항 방파제의 등대는 이렇게 생겼다. 전에 시내에 있는 기념품샵 ‘신기루 상점’에서 이 등대를 본 따 만든 자석을 봤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이 길을 좋아한다. 바다 바로 옆이라 풍경이 시원하다.
앞쪽에 설악항 방파제가 보인다.
설악항 주변은 ‘해맞이공원’이다.
여러 조각이 전시되어 있고
바다를 바라보며 쉴 수 있는 벤치며
인어 동상도 있다.(왜?)
이제 설악항 회센터가 보인다.
여기에 영화에서 본 ‘호섭이네’라는 가게도 있는데, 같은 곳일까?
일단, 영화 초반 수하가 엄마 가게에 찾아올 때 살짝 보였던 배+방파제 풍경이 비슷하다.
식사하는 공간 너머에 어선이 정박해 있는 곳이라는 조건에도 부합한다.
안에 들어가서 직접 확인하고 사진도 찍고 싶었는데, 가게마다 호객하는 분들이 계셔서 부담스러워 못 갔다. 먹지도 않을 거라 미안하기도 하고.
주변을 맴돌며 이리저리 상상해 보는데, 거의 흡사하다. 근데 포장마차가 아니다.
영화를 찍은 2023년 초반까지는 포장마차였다가, 그 후에 지금처럼 튼튼하게 리모델링을 한 게 아닐까 추측해 본다.
회센터에서 일하는
엄마의 일상은 어땠을까?
설을 앞두고 엄마는 수하와 함께 시장 한복주단에 간다. 수하가 입을 설빔을 고르다가, 한편에 걸린 외투를 한 번 몸에 대보는 장면이 나온다. 수하가 입어보라고 해도 손사래 치는 엄마.
사실, 엄마 세대가 좋아할 만한 디자인은 아니다. 인터넷으로 뭐든 살 수 있는 지금 같은 시대에, 70년대생 엄마가 한복집에서 파는 누빔 외투를 마음에 들어 한다고? 약간은 어색한 외국인의 시선이거나(감독이 일본계 프랑스인, 작가도 프랑스인), 아니면 평소에 옷 사러 갈 틈도 없이 사는 엄마의 상황을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엄마는 모처럼 딸과 목욕도 하고, 설빔도 사주면서 서울 사는 언니가 방문할 설날을 준비한다.
평소에는 여기 가게에서, 바쁘게 일한다. 새끼 문어도 팔고, 복어회도 판다. 서울로 대학에 가며 독립한 딸이, 고향에 돌아와서도 일하는 펜션에서 지내느라 자주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쉬는 날엔 딸이 집에 와서 자고 간다는 생각에 내심 설렌다.
그런 엄마는 프랑스인 아빠를 가슴에 묻고 산다.
두 눈으로 보고 나니 아쉬움이 없어졌다. 설악항 앞 ‘설악산 입구‘ 정거장에서 7-1번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