툴르즈 로트렉(Toulouse-Lautrec) 전
고대하던 틀루즈 로트렉 전시를 감상하러 그랑 팔레에 다녀왔다. 그랑 팔레는 지난번 첫째 아이 현장 학습 때 ‘La Lune(달)’ 전시를 보러 학부모 동행자로 가봤던지라 익숙했다.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그랑 팔레 전시는 역시 알차다. 두 시간 동안 지루할 틈이 없었다.
미술 감상법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작품 감상 전에 작가의 배경, 세계관, 시대 상황, 미술 사조나 기법 같은 객관적 정보를 미리 공부하고 보는 것이 좋다는 의견, 낯선 사람을 만난다는 느낌으로 선입견 없이 작품과 주관적으로 마주하는 게 좋다는 의견, 아니면 그 둘을 적절히 섞어 조화를 찾는 게 좋다는 의견 등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더 심층적으로 나뉠 테다.
예술 자체에 정답이 없듯이 예술을 대하는 태도에도 정답이 없기에 좋아하는 미술 감상이라지만 어렵게 느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나는 주로 그냥 가는 편이다. 워낙 미술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어 혹시나 검색하다 다른 사람의 관점에 영향을 받아 작품 앞에 내가 온전히 반응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서다. 가뜩이나 귀도 얇고 감정을 표현하는데 서툴다 보니 더 그렇다. 게다가 주입식 교육과 효율성을 따지는 체계에 익숙한지라 모든 작품을 흡수하고 싶은 욕망과 강박이 미술관만 가면 저절로 생겨난다는 점도 미술 감상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암기하듯 잔뜩 힘을 주고 작품 전체와 일일이 씨름하니 막상 전시회를 다 보고 나서 한 작품도 기억에 남지 않아 허탈했던 순간도 여럿 있었다.
가끔은 대단한 명화를 앞에 두고도 그 어떤 것도 느낄 수 없는 무감각하고 무지한 나 자신에게 화가 나 자책했던 나날도 있었다.
미술 감상에도 나름의 경험과 훈련이 필요한 듯 싶다.
이제는 산책하듯 가벼운 마음으로 미술관을 다니려 노력 중이다. 모든 그림을 다 봐야 한다거나 무언가를 꼭 느껴야겠다는 미션을 내려두고 한두 가지라도 마음에 꽂히는 작품 앞에 한참을 머무른다. 그럴 때 날것의 나와 작품이 만나며 생기는 스파크 그리고 나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는 맛을 경험하니 오히려 나의 무지를 즐기며 작품을 감상하게 되었다. 전시회를 다녀와서 마음에 담아뒀던 작품과 작가에 대해 뒤늦게 알아보며 타인의 생각과 나의 것을 비교해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렇게 나만의 미술 감상법을 구축해 가고 있다.
틀루주 로트렉에 대해선 약간의 사전 정보가 있었다. 부유한 귀족 출신이지만 하반신의 성장이 어린이에 머물러 있는 장애로 난쟁이라 불렸던 사람. 물랭루주 포스터로 유명한 후기 인상주의 화가. 환락가와 무도회장에서 만난 여성들의 삶을 주로 관찰하고 그렸던 화가. 전시회를 먼저 다녀온 지인의 평도 들었다.
“전반적으로 전시는 암울했고, 뒤틀리고 왜곡된 여성관을 담고 있는 로트렉의 그림들이 불편했다.”
하지만 난 로트렉의 그림을 보며 지인과 전혀 상반된 감정을 느꼈으니 역시 예술에는 정답이 없다.
로트렉이 그린 에밀 베르나르와 반 고흐.
로트렉은 각 사람이 풍기는 고유의 체취를 예리한 관찰력으로 포착했다. 마치 그 사람을 이루는 내면의 근원적 뿌리의 감정을 끄집어내서 그걸 내내 바라보며 그린 거 같다.
포즈도 제각각이다. 한 인간의 내면을 화폭에 담기 위해 그 영혼에 끈질기게 시선을 두며 관찰했을 법한 초상화들이다. 여인들의 축 처진 어깨가 말하는 듯했다. 곤고한 생에서 잔잔히 흐르는 절망과 슬픔을. 벗은 몸에 무릎 위까지 올라와 있는 검은색 타이즈가 그녀들의 직업을 시사하며 야릇하고, 섹슈얼하게 보일 수 있지만 “Rousse(La Toillet)” 작품에서는 아름다움을 넘어 어떤 힘이 느껴졌다.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하는지가 과연 그 사람의 존재를 규정할 수 있을까. 물론 영향은 줄 수 있다. 그러나 사회에서 존경받고 고결하다고 믿는 직업을 가진 사람 중에 얼마나 파렴치한 저질들이 많은가.
로트렉은 그 어떤 처연한 직업이나 상황이라도 흔들리거나 변질될 수 없는 한 사람의 내면에 숨겨져 있는 생명의 힘을, 한 인간의 존엄을 봤고 그것을 그렸다. 그래서 이토록 왜소하고 연약한 여인의 몸에서 무엇인지 정확히 정의 내릴 수 없는 빛나는 힘의 전율이 느껴졌나 보다.
로트렉이 명성을 얻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물랭루주 광고 포스터. 당시 금기시될 정도로 파격적이면서도 센세이션이었던 캉캉춤의 댄서 라 굴뤼La Goulue 와 잔 아브릴Jane Avril이 모델인 작품이 여러 개 있었다. 그 당시 카바레의 빛나는 실내조명과 경쾌한 음악과 요란한 춤의 열기가 전해지는 듯하다. 하지만 유희와 환락의 정중앙에서 사람들은 음울해 보이고 퀴퀴한 분위기마저 느껴진다. 그 어떤 종류의 강력한 쾌락도 허무한 욕망을 결코 채울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우울하고 불만족스럽다.
로트렉 어머니의 초상화.
창밖에서 들어오는 자연광을 받으며 고급스러운 가구들을 배경으로 독서 중인 어머니의 흐트러짐 없는 모습에서 기품이 느껴진다. 동시에 다소 고지식하고 슬퍼 보이는 어머니를 향한 로트렉의 애정이 느껴진다.
파리 몽마르트르 유흥가의 대스타였던 디바 이베트 길베르. 로트렉의 그림과 달리 실제로 이베트는 예뻤다고 하는데 왜 로트렉은 그녀를 저토록 세월에 찌들고 음흉한 능구렁이처럼 표현했을까. 화려한 조명 아래 멋스럽게 노래를 부르며 추앙받는 스타의 이면에 지치고 고단하지만 끊임없이 사람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소멸해 가는 그녀의 본모습을 꿰뚫어 본 걸까.
이 그림들은 나를 슬프게 했다. 그녀들을 이곳으로 내몬 현실이, 그 가난이, 가난을 생산한 그 구조가. 사방이 막혀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삶 속에 갇힌 그녀들의 일상. 희망 없이 이어지는 육체를 갉아 먹는 노동.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 삶의 비애와 고통. 로트렉은 그런 그녀들의 모습을 과장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동정이나 연민 없이 그저 느껴지는 대로 그의 날카로운 눈에 비치는 대로 묘사했다. 그래서 로트렉이 그린 여자들은 대부분 아름답지 않다.
로트렉전을 나보다 앞서 감상했던 지인의 평처럼 로트렉의 그림에서 여성에 대한 삐뚤어진 시선을 난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남성임에도 그녀들을 대상화하는 게 아니라 그 안으로 직접 들어가 그녀들 속에 감춰진 깊은 내면의 고통을 누구보다도 가깝게 느꼈고 사실 그대로 기록해 놓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스쳤다. 만약 로트렉이 장애가 없었다면 과연 이런 그림들을 그릴 수 있었을까? 실제로 그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내가 다리가 조금만 길었더라면 그림 따위는 그리지 않았을 거야.” 로트렉은 혈통이나 가문만큼이나 외모가 화려한 형제들, 사촌들, 친척들 사이에서 소수자로 살아가며 무시와 차별을 당했을 거고 삶의 불공평과 불행한 운명에 대해 고민했을 거다.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천대받으며 삶을 견디는 여성들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었던 건 로트렉 자신이 먼저 그러한 아픔을 겪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로트렉의 그림은 작위적이지 않았다. 진정 솔직했고 어떤 면에서는 순수하기까지 했다. 그는 실력 있는 화가이기 전에 훌륭한 사람이었다. 타인의 고통을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영혼을 가졌으니까. 붓을 들고 그 시대에 가장 낮은 곳에 있었던,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던 사람들의 고통을 직시하며 그들과 함께했던 화가 로트렉. 그림 속에 녹아있는 그의 진심을, 그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