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좋아했던 어린 시절 나
돌아보면 난 그림을 좋아했다. 중학교 시절 슬램덩크나 힙합 같은 그 당시 유행하던 만화책을 보며 최애하는 캐릭터를 남몰래 즐겨 그렸다. ‘정대만’이 3점 슛을 넣는 장면이나, ‘바비’의 정통 힙합 패션을 똑같이 그리기 위해 지우고 다시 그리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던 기억이 난다. 그림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으니 연필을 어떻게 잡고, 어떤 느낌으로 선을 그려야 하고, 명암을 넣어야 하는지 몰랐다. 학교 미술 수업에서 배운 얕은 지식과 경험을 총동원해 단순히 만화책과 똑같이 그리려고만 했다. 그림에 생각과 감정을 담을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당연히 내 그림은 어설펐고 만화책 캐릭터와도 묘하게 달라 누구에게도 자신 있게 보여줄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림그리기가 좋았다. 공부와는 다르게 그릴 때만큼은 저절로 몰입할 수 있었고, 그린다는 행위 자체가 즐거웠던 거 같다.
초등학교 4학년 때는 다른 몇몇 아이들과 함께 학교 대표로 뽑혀 지역 사생대회에 출전했다. 학예회 장면인지 콘서트 장면인지 무대 위에 공연하는 사람들과 관중을 그렸는데 인물의 표정 하나하나가 생동감 넘친다며 칭찬받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그림 한 점을 미리 제출하고, 대회에 참석해서는 주최 측에서 제공하는 종이와 물감으로 똑같은 그림을 그려야 했다.
엄마는 내가 학교 대표로 뽑혔다는 사실에 자랑스러워했다.
예전에 자신도 그림을 잘 그렸다며 내가 엄마를 닮은 거 같다고 뿌듯해했다. 모든 걸 나 대신 완벽하게 해주는 게 사랑이라 믿었던 엄마는 나 대신에 연필과 붓을 들었다. 나무는 이렇게 그리는 거라며 초록색 물감에 흰색을 섞거나 오렌지색, 빨간색, 갈색을 섞어 다양한 스펙트럼의 녹색을 만들고선 붓끝으로 나뭇잎을 하나하나 찍으며 현란하게 흰 도화지에 색을 입혔다. 엄마는 자기 작품을 보며 흐뭇해했고, 4학년이 보기엔 그런 엄마의 그림은 너무나도 완벽했다. 그 후로 난 내 그림을 더 이상 자유롭게 그릴 수 없었다. 엄마는 자신의 그림을 내 것인 양 제출했다. 대회 당일에는 엄마의 나무를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억지로 애썼음에도 그런 느낌을 흉내 낼 수 없어 좌절감과 열패감이 들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공부하다 지루하면 방 안에 틀어박혀 아주 가끔 연필로 쟈도르 향수 표지 모델, 데이비드 베컴 같은 꽂히는 인물을 끄적거렸지만, 성인이 돼서는 아예 그림을 그릴 일이 없었다.
그러다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한 건 아이 둘을 낳고 나서다. 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어느 그림책 작가 선생님이 진행하는 그림 수업에 등록했다.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맡기고 매주 목요일 오전마다 찾아가 그때의 심경을 그림에 토로하며 무작정 그리기 시작했다. 극심한 아토피 피부염으로 온몸이 화상 입은 거처럼 살갗이 벗겨지고 진물이 흐르는 아이 둘을 대학병원에 주기적으로 들락날락하며 키우느라 경력 단절이 되고 힘겨워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없고 엄마라는 과도한 역할이 나를 갉아먹고 있을 때 ‘마음이 아플까 봐’, ‘집으로 가는 길’, ‘내가 함께 있을게’, ‘100만 번 산 고양이,’ 등과 같은 그림책에 위로받았다. 여러 그림책을 접하고 그림 수업을 들으며 처음으로 깨달았다.
‘잘 그리든 못 그리든 그건 아무 상관없구나, 마음을 오롯이 그림에 담으면 되는구나!’ 수업을 통해 그림책도 한 권 만들었다.
프랑스 파리에 살며 나에게 가장 좋았던 점 하나를 꼽으라면 바로 미술관이다. 어느 미술관을 방문하던 마음을 건드리는 그림들이 있고, 서울보다 저렴한 입장료나 무료로 영혼이 깃든 수준 높은 작품들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었다. 집 근처에 있는 파리시립미술관은 내 집 드나들 듯 다녔고, 오르세 미술관, 오랑주리 미술관도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루브르 박물관, 피카소 미술관, 퐁피두 미술관, 로댕 미술관도 갈 때마다 새로운 감동을 주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전시는 그랑팔레에서 진행한 틀루즈 로트렉 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