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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랑 Oct 16. 2023

프랑스 치유 일기-파리 시립 현대 미술관

파리 시립 현대 미술관 Musé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



파리 16구 중심에 살면 좋은 점이 꽤 많다. 센강과 에펠탑이 가까이 있어 여유롭게 거닐 수 있는 아름다운 산책 코스가 있고, 파리 시립 현대미술관, 팔레 드 도쿄, 그랑 팔레, 쁘띠 팔레 같은 미술관이나 인류박물관, 케 브랑리 박물관도 가깝다. 개선문과 샹젤리제와도 가까워 휘황찬란하고 화려한 거리에서 활보하는 군중의 활기찬 분위를 느끼고 싶다면 365일 언제든 열려있다. 한국문화원도 집 근처에 있어 한국 책도 간간이 빌려볼 수 있었는데 아쉽게도 문화원은 지난 10월에 지하철 두 정거장 거리만큼 이전했다. 이전 기념행사로 프랑스어로 더빙된 [마당으로 나온 암탉]을 상영해 아이들과 다녀왔다. 이전해서 새롭게 단장한 문화원은 전보다 규모 면에서 두 배 이상 커졌고 한국 역사와 문화를 알리는 콘텐츠도 더 다양해졌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16구 중심에 살며 가장 좋은 점은 바로 파리 시립 현대미술관이 가까이 있다는 거다. 

무료로 개방된 이 현대미술관에는 특별 전시도 있지만 후기 인상파, 야수파, 입체파 작품들이 상설 전시돼 있다. 그리고 수준 높은 아틀리에가 수시로 진행돼 예약만 하면 양질의 미술 수업을 받을 수 있다. 만 5세~7세를 위한 어린이 아틀리에가 관람료, 재료비 다 포함해서 5유로(약 6,500원)다. 선생님과 함께 설명을 들으며 그룹으로 전시를 관람한 후, 그와 관련된 미술 활동을 한다. 한국에서는 이와 유사한 프로그램이 3만 원 가까이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확실히 프랑스는 예술 선진국답게 이런 아틀리에도 미술관마다 제공하고 있어 누구나 저렴한 가격에 부담 없이 예술을 접할 수 있다. 한 시간 반 동안 진행되니 아이들을 맡기고 엄마 아빠도 편하게 커피 한잔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미술 선생님은 첫째 아이가 창의적이고 재능 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이들도 자신들의 작품을 자랑스러워하며 집까지 꼭 붙들고 갔다.


파리 시립 현대미술관은 오르세, 퐁피두 같은 유명한 미술관보다 사람이 적은 편이라 한산하게 작품 감상에 몰입할 수 있다. 가끔 현장학습sortie 나온 학생들과 마주치기도 하지만 워낙 방문객이 적어 그마저도 상관없다. 

파리 태생인 프랑스 화가 로베르 들로네Robert Delaunay의 작품이 많았다. 들로네는 오르피즘Orphism 창시자다. 큐비즘에서 출발한 오르피즘은 기하학적 구성에 색채를 강조한 추상회화다. 특히 미술관 팸플릿 디자인에 사용된 에펠탑 그림이 인상적이었는데 그게 바로 들로네의 작품이었다. 구도와 색채가 과감하고 독특함에도 조화가 느껴져 감각적이고 아름다웠다. 에펠탑이 훤히 보이는 커다란 창 옆에 그림이 전시돼 있어 그림의 소재가 된 실제 건축물과 비교하며 바라보는 재미도 있었다. 일반적인 정물화와 확연히 다른 들로네의 그림. 면과 원으로 나뉜 형태에 다양한 색채를 대비하여 사용함으로써 밝고 힘이 느껴지게 한 그림이다. 자칫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는 구성임에도 강렬한 색의 조화로 부드럽고 모던하고 세련된 패턴을 보는 듯하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기욤 아폴리네르가 들로네의 추상 회화를 리드미컬한 음악에 비유하며 그리스 신화의 음악가인 오르페우스의 이름을 따서 오르피즘이라 지어주었다고 한다. 오르피즘에 대한 정보 없이 들로네의 초대형 그림을 먼저 접한 나는 이게 뭔가 싶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부드러운 선율이 느껴지는 것 같긴 한데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도통 파악이 안 돼 한참을 들여다봤다. 여러 원이 좌우대칭을 이루는 거 같으면서도 색과 위치에 차이와 변형을 두어 대칭에 균열이 느껴졌다. 


지난번 퐁피두 박물관에서 느꼈던 거처럼 추상 회화는 역시나 어렵고 복잡하구나 재차 확인했던 순간이었다. 

입체파를 대표하는 두 작품

파블로 피카소의 [남자의 두상]

조르주 브라크의 [여자의 두상]

큐비즘이라 불리는 입체주의 그림은 어렵지만 보면 볼수록 입체주의가 실현하고자 했던 바가 무엇인지 알 거 같기도 하다. 특히 큐비즘 방식으로 사람을 그렸을 때 인간의 얼굴과 신체를 조각조각 나누어 동일한 형태의 기하학적인 패턴으로 표현한 걸 보면 결국 인간의 본질은 다 똑같다고 느껴진다. 하지만 껍데기의 다름과 차이로 종으로, 색으로, 모양으로, 크기로 인간 안에 차등을 두어 여러 레벨로 사람을 나누려 하는 이기심과 탐욕은 인간사에 끊이지 않는다. 대상을 여러 관점에서 분할하면 할수록 다름이 아니라 가죽에 불과한 인간 육체의 동일함이 증명되는 거 같이 보인다. 결국 인간은 다 똑같은 인간임을 큐비즘 회화를 통해 생각해 본다. 


앙드레 드랭


앙리 마티스와 함께 야수파의 공동 창시자다. 

대상에 부여되는 정해진 색채의 공식을 깬 드랭의 그림은 형태 또한 단순해 고갱 그림의 느낌도 나고 마티스 그림의 느낌도 난다. 사실 드랭의 그림은 풍경화를 봐야 진가를 알 수 있다. 원색 중심의 활활 타오르는 듯한 강렬한 색채와 거친 붓 터치가 심플한 형태 속에 독특하게 표현되어 그의 개성이 확 느껴진다. 아쉽게도 파리 현대미술관에는 드랭의 풍경화가 없었다. 

난 라울 뒤피의 그림에 가장 큰 매력을 느꼈다. 

꿈꾸는 듯한 몽환적이고 리듬이 느껴지는 편안한 그림이란 생각이 들어 힐링하듯 그림을 감상했다. 밝고 경쾌한 파스텔 계열의 색채도 그렇고 인물을 선명하게 표현하지 않은 것도 마음에 들었다. 이 모든 조합에서 순수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야수파를 대표하는 표현주의 화가 앙리 마티스.

La Dance 연작. 

퐁피두 미술관에서 접한 마티스의 그림에서도 느꼈지만 마티스의 작품은 심플함의 진수와 미학을 보여주는 듯하다.

세세하게 표현된 그 어떤 그림보다 역동성과 힘, 인간의 몸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동작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약 백 년 전에 탄생한 20세기 초 작품이 어떻게 이렇게 감각적일 수 있단 말인가 연신 감탄하며 바라봤던 작품이다. 


피카소의 조각과 작품. 

장례식과 여러 상징적인 장면이 한 화폭에 동시에 연출된 이 그림은 전반적으로 슬프고 절망적인 감정이 느껴진다. 인물들도 하나같이 표정을 없애고 몸짓과 형태로 감정을 표현했다. 딱 봐도 샤갈의 작품이구나 알 수 있었던 그림. 

땅과 하늘이 반대로 뒤집혀 있고 반나체 여인이 결연한 표정의 거대한 토끼 위에 축 늘어져 있어 죽은 건지 산 건지조차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그림이다. 과연 이 그림은 어떤 상징과 비밀을 담고 있을까. 모딜리아니의 초상화 속 모델들은 하나같이 참 우아하면서 슬프다. 어느 사조에도 속하지 않고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 나간 


모딜리아니.

처음에 모딜리아니의 작품을 접했을 때 뭔가 기이하고 낯설어 아름답다 느끼지 못했었다. 하지만 모딜리아니의 그림은 보면 볼수록 빠져든다. 단순해 보이지만 복잡하다. 나에게 끊임없이 말을 거는 듯하다. 초상화마다 같은 기법을 사용했음에도 그림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에너지와 감정이 완전히 다르다. 


수잔 발라동은 모델이자 화가이며 화가인 모리스 위틀리오의 어머니다. 그랑 팔레 로트렉전에서 수잔 발라동을 모델로 한 그림을 보며 참 강인한 내면을 소유한 사람인 거 같단 느낌을 받았는데 그녀의 일대기를 보면 가히 그러하다. 사생아로 태어나 어린 나이서부터 궂은일을 하며 몽마르트르에 살았던 그녀는 르누아르, 드가, 로트렉 등 예술가들의 뮤즈이자 모델로 생계를 이어가며 자신만의 그림을 꾸준히 그렸다. 18세에 사생아인 모리스를 낳았고 그 후로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며 예술 활동에 매진했다. 여성의 누드를 풍채와 곡선을 강조하여 아름답게 그린 남성 화가의 시선에 반해 발라동은 세월과 삶의 흔적이 곁든 있는 그대로의 여성 누드를 그렸다. 수잔 발라동은 “예술은 우리들이 증오하는 삶을 영원하게 만든다."라는 말을 남겼다. 남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성으로서 자신이 믿는 그림을 어깨너머 배운 실력으로 꿋꿋이 그렸던 그녀가 존경스럽다. 


모리스 위틀리오의 그림을 여러 미술관에서 수없이 봐왔지만 그동안 수잔 발라동과 연결 지어 보지 못했다. 잘 그린 풍경화임에도 뭔가 공허하고 애잔한 느낌이 들었는데 이제서야 왜 그러했는지 이해가 갔다. 그는 사생아로 태어나 할머니에게 맡겨져 방치된 채 어린 시절부터 알코올 중독에 빠져 힘겹게 살았다고 한다. 치료를 위해 어머니의 권유로 그림을 독학으로 시작했다는데 이런 삶이 어디 평탄했으랴. 

오랑주리 미술광에서 처음으로 접했던 마리 로랑생 그림. 

역시나 우아하고 사랑스럽게 여성 인물들을 묘사했다. 초상화에서는 지적이고 우울하면서 패션 감각이 뛰어난 중년의 세련된 파리지엔느가 보인다. 


샤임 수틴이 그린 초상화

마치 아이들이 크레파스로 꾹꾹 힘주며 장난삼아 그린 그림들 같다. 수틴은 표현주의 화가라는데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동물들 사체를 그린 걸 보고 정말 독특하고 강렬하다 생각했는데 초상화 또한 남다르다. 

파리 현대미술관에는 백남준의 비디오 예술작품도 전시돼 있다. 


집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위치해 있고 입장료도 무료라 마음이 움직이면 동네 마트에 가듯 슬렁슬렁 파리 현대미술관에 다녔다. 심심하면 가고, 속상하면 가고, 비가 오면 갔다. 

귀차니즘 때문에 더 자주 못 다닌 게 이제 와서는 매우 아쉽지만 그래도 강변과 미술관이 있는 동네에 살았다는 건 파리에서 누렸던 가장 큰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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