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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랑 Oct 16. 2023

프랑스 치유 일기-에필로그

Au Revoir, Paris

2020년 파리를 떠나며

 

18개월 동안 파리에서 여행하듯 살았다. 

다만 보통의 여행과 달랐던 점은 우리는 프랑스인들의 삶에 깊숙이 들어가 아이들을 프랑스 공립학교에 보냈고, 다양한 파리지앵과 우정을 쌓으며 현지인처럼 살았다. 샤리오(장바구니 카트)를 끌고 동네에 서는 장이나 마트에 다녔고, 주말마다 파리지앵들이 즐겨 찾는 공원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의 방학을 이용해 5개 나라 13개 도시를 여행했다. 

사람들이 사는 곳은 다 거기서 거기라지만 우리는 낯선 땅에서 다른 문화를 접하고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끊임없이 고정관념이 깨지고 인식과 의식이 확장되는 경험을 했다. 당연히 그렇다고 믿고 살아왔던 삶의 여러 방식과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자각을 시작으로 내 삶에 적용해 보기까지 고통스럽고 괴로웠던 때도 있었다. 자기 합리화와 정당성을 부단히 내세우며 내면은 전쟁이었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해 나 자신을 포함한 인간에 대한 이해가 예전보다 조금 더 깊어질 수 있었고,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자유로움을 맛볼 수 있었다. 이것은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귀중한 자산이 되었다.


또한, 18개월 동안 우리는 인생의 방향성과 속도에 대해 고민했다. 고민을 거듭할수록 우리만의 방향성과 속도를 찾을 수 있었다. 남들과 다른 길을 가며 인생의 막막함과 불안함을 무모할 정도로 정면으로 맞서보니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게 비로소 보였다. 미래를 계획하고 눈앞에 보이는 것에 안정을 찾으며 현실의 노동과 경쟁에 집중하며 살던 때보다 오히려 고달프고 만만치 않은 삶 앞에 더 자신감이 생기기도 하였다. 그리고 충분한 정신적, 육체적 쉼이 있었다.


사실 우리가 육아휴직을 내고 유럽에서 살아본다는 프로젝트를 주변에 알렸을 때 큰 우려가 있었다. 한창 일해서 돈 모아야 할 때 아니냐는 둥, 재정적으로 넉넉한 집안도 아니면서 굳이 아까운 돈 탕진해 가며 왜 그렇게까지 모험하냐는 둥, 한국이 최고지 왜 사서 고생을 하냐는 둥, 복직해서 잘 견딜 수 있겠냐는 둥, 회사에서 잘리는 거 아니냐는 둥, 애들이 부적응아가 될 수 있다는 둥, 별의별 말을 다 들었더랬다. 그중 아이들에 관한 게 제일 마음을 아프게 했다. 언어에 혼란이 오고 정서적으로 불안해서 아이들이 잘못된 경우를 자주 봤다는 식의 이야기는 언제나 마음에 돌덩어리를 얹은 듯한 죄책감을 불러일으켰다.


18개월의 프로젝트를 마친 지금, 한국에 돌아가서 만나게 될 지인이 그래서 너네는 뭘 얻었니, 뭘 배웠니, 뭐가 달라졌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그들의 입맛에 맞는 답을 해줄 수 없을 것이다. 더 솔직해지자면 우리가 느끼고 배운 것을 구구절절 말할 필요와 의미를 못 느끼겠다. 특히나 인생의 모든 가치를 숫자로만 증명해야 하는 효율성과 생산성으로 판단하는 결과론자들에게는...


다행인 건 아이들은 여전히 밝고 건강하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설사 회사에서 권고퇴직을 당하더라도 우리는 앞으로의 길을 우리의 속도대로 개척해 나갈 용기가 생겼다. 파리에 살았기 때문에 만날 수 있었던 특별한 인연은 앞으로의 인생에 큰 힘이 돼 줄 거다.


지인이 본다면 파리의 삶 전과 후에 우리의 모습에서 크게 달라진 점은 아마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지난 18개월의 삶은 우리 영혼의 깊은 부분을 뿌리째 흔들었고, 그 파장은 전적으로 우리만 안다. 그러기에 굳이 남에게 우리의 경험과 깨달음을 설명하고 납득시킬 필요도, 남이 우릴 보며 그 어떤 판단을 하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테다. 어차피 인간은 각자의 지식과 경험 안에서만 판단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존재니까.


고대했던 18개월의 대장정이 눈 깜짝할 사이에 막을 내렸다. 충분하다 느끼면서도 섭섭한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벌써 파리가 그립다. 이럴 때면 늘 저만치 앞서 한결같이 흘러가는 세월을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에 덧없음을 느낀다. 


그럼에도 세상의 속도를 거슬러 한껏 발악해 보며 우리 자신과 날것으로 끈질기게 대면한 이 프로젝트는 덧없는 우리네 인생에 한 줄기 빛이 돼주었다. 마치 나라는 인간의 적나라함을 깨닫기 위한 초급 코스를 졸업한 듯한 기분이기도 하고, 황홀한 꿈에서 깬 듯한 기분이기도 하다. 여전히 인생 앞에 두려움과 혼란은 있겠지만, 지인이 무심코 던진 말 앞에 꿈틀댈 때도 있겠지만, 우리는 결단코 파리의 삶 전과 같이 살 수는 없을 거다. 

앎이 달라졌고 믿음이 달라졌으니까. 






시, 한국으로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패닉 상태에 빠지기 시작할 무렵 이스라엘 벤구리온 공항에서 국제선 탑승구로 입장하는 우리 가족에게 공항 직원은 여권을 일일이 확인하며 어디로 가냐고 물었다. 대수롭지 않게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하니 그는 왜 지옥 불을 향해 걸어 들어가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살짝 비꼬며 말했다. “Really? You are so brave.” 중국에서 코로나가 발원하고 이웃 나라인 한국으로 막 유입되는 시점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한국에 도착한 후 2주가 채 안 돼서 이스라엘 내 감염자 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했을 뿐 아니라 벤구리온 공항을 비롯해 대부분의 공항이 shut down 됐다. 전 세계 수많은 사람이 타국에 고립되고 가족과 생이별하는 전례 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길거리에 시체들이 쌓이고 병원과 공공기관에서 시스템이 마비되는 대혼란을 모든 대륙에서 목도했다.   


인생은 타이밍이라 했던가. 전 세계를 예측 불가한 공포와 불안에 빠트린 전염병이 창궐할지 누가 알았겠는가. 코로나가 터진 후 약 3년 동안 대한민국 여권을 들고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일은 꿈같은 일이 돼버렸다. 

우리 가족은 아이들이 나고 자란 서울의 한 지역으로 다시 터를 잡고 짝지는 회사로 복직했다. 나도 월급 받는 프리랜서 일을 다시 구했고 아이들은 한국 공립학교로 편입했다. 


우리가 살던 동네 아파트값이 6억에서 13억으로 비정삭적인 널뛰기를 하고, 한창 공사 중이었던 은행 건물이 완성된 것만 제외하면 모든 게 그대로였다. 브랜드별 아파트 대단지로 빼곡히 채워져 잘 보이지 않는 서울의 하늘 풍경도, 각종 학원, 병원, 편의점, 헬스장을 우후죽순 표시한 정신없는 간판들도, 개성 없는 콘크리트 빌딩이나 상가 건물들도, 꽉 막힌 도로 위에서 여기저기 거칠게 울리는 경적도, 극심한 경쟁에 지쳐 보이는 표정 없는 회사원들과 학생들도. 


다시 그 삶으로 복귀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주류처럼 이제는 더 이상 살 수 없었다. 십억 넘는 아파트를 소유하기 위해 빚에 매여 사는 삶, 자식을 일류 대학에 보내기 위해 무자비한 사교육 경쟁에 내모는 삶, 주말만 겨우 숨 쉬다 일요일 저녁이면 다시 숨 막히는 루틴으로 내몰리는 삶, 무엇보다 참 나로 살지 못하면서 이 정도면 괜찮다고 끊임없이 자신을 기만하고 합리화하며 동시에 불안에 쫓기는 삶.


비주류더라도 다르게 살아도 괜찮다는 용기가 생겼다. 마음 가는 대로 한번 살아봤더니 좋았더라는 경험이 있으니 두 번 못 할 건 없지 않나 싶었다. 아니, 몇 번이든 행복과 기쁨을 좇지 못할 건 또 뭔가 싶었다. 그 질문과 함께 현재 우리 가족은 철밥통에 정년이 보장됐던 공기업을 퇴사하고 제주도로 뿌리째 옮겨와 살고 있다. 제주도에 와서 나는 여전히 프리랜서로 일하며 계속 나를 찾아가고 치유하는 과정을 진행 중이다. 


다만, 서울의 삶과 달라진 점은 초등학생인 나의 아이들은 평일 방과 후에도 기본 4시간 이상 푸른 

잔디로 뒤덮여 있는 너른 학교 운동장에서 원 없이 뛰논다. 주말에도 포구에서, 바다에서, 숲에서 하루 

종일 노는 게 주 일과다. 마을을 산책하며 우연히 황혼빛 하늘 아래 헤엄치는 돌고래 떼를 보기도 하고, 쏟아지는 별과 슈퍼문 사이에서 떨어지는 별똥별도 본다. 고요 속에 오로지 요동치는 파도 소리와 새와 곤충 소리를 들으며 밤낮 산책을 즐긴다. 갖가지 파스텔색이 한데 섞이며 물들어 가는 하늘과 입체적으로 떠다니는 비현실적인 구름을 감상하며 우리네 마음도 충만한 행복감으로 물들곤 한다. 

올레길, 오름, 곶자왈을 걷고 바다 수영을 하고 좋은 인연을 만나고, 하고 싶은 공부만 하며 유희가 가득한 일상을 채워가고 있다. 하지만 이 삶이 영원하지 않으리란 사실 또한 안다. 프랑스 파리살이가 그랬듯이 우리 가족은 가장 완벽한 한 때를 이곳에서 보내고 한 뼘 성장한 우리에게 맞는 또 다른 낯선 곳으로 떠나게 될 것이다. 


나에 대한 앎과 선택에 따르는 불안은 반비례다. 진짜 나를 알수록 인생의 불안이 낮아진다. 좀 더 통합된 내가 하는 선택이기에 숙명 같은 확신이 든다. 그래서 앞으로 어디로 갈지, 어디에서 살지, 무얼 하며 일상을 채울지, 누구와 관계를 맺을지 내 마음에 전적으로 맡길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결국 이 모든 몸부림은 안전한 항구를 찾고 싶은 갈망이었다. 나의 부모님은 자신들만의 결핍으로 나에게 안전한 항구가 되어줄 수 없었다. 한데 이제는 안다. 엄마는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을 안 준 게 아니라 못 주었다는 걸. 엄마만의 그 결핍이 없었다면 진즉에 주었을 것이다. 엄마는 늘 딸에게 최선을 다하고 싶었으니까. 나 역시 내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하고 싶다. 그러나 내 결핍으로 아이들은 또 다른 결핍을 갖게 될 테다. 이런 꺄르마karma의 원리를 알게 되면서 엄마 안에 상처받은 어린아이를 안아줄 용기가 아주 조금은 생긴 거 같다. 


그럼에도 엄마를 끌어 안기가 아직은 무섭다. 이마가 좁다며 아프다고 발버둥 치는 8살 딸을 꽉 붙잡고 차가운 집게로 잡초처럼 수북이 나있는 잔머리를 한 올 한 올 새빨개질 때까지 매일밤 뽑아댔던 엄마. 중학교 2학년 아이가 말대꾸한다고 통기타가 부서지고 몸이 피멍으로 붉게 물들고 나서도 사정없이 때린 엄마. 중 3 때 야채를 안 먹는다는 이유 하나로 친구가 지켜보는 앞에서 소리 지르며 화장실에서 무릎 꿀리고 물 가득 담긴 세숫대를 들고 벌서게 한 엄마. 그렇게 엄마의 결핍으로 본의 아니게 나를 옭아맸던 폭력의 기억이 내 온몸 군데군데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언젠가 30대의 엄마가 썼던 일기를 우연히 본 적이 있다. “생각하지 못하게 머리가 없었으면, 느낄 수 없게 마음이 없었으면 좋겠다.”란 구절을 읽고 펑펑 울었다. 어린 시절 이해하진 못했지만 느낄 수 있었던 뫼부우스 띠처럼 영속적일 거 같았던 엄마의 고통이 환기됐기에.  

지금도 엄마를 생각하면 이런 양가적인 감정이 든다. 한없이 무서우며서 한없이 불쌍하다. 


나의 항해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진짜 나를 찾는 여정의 끝에 궁극적으로 닻을 내릴 항구가 정확히 어딜지, 어떤 풍경일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히 아는 건, 모든 배가 레이싱하듯 전속력으로 항해하는 목적지와 내가 가는 방향은 정반대라는 사실이다. 그 바다 위에서 때로는 표류할 때도 있고, 때론 전속력을 다해 항해할 때도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이 항구에 다다르기 위해 꼭 필요한 관문임을 알기에 순간을 즐기며 감사하고 내일을 기대한다. 


그리고 나와 세상을 향해 외친다. 


나답게 살고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 우리는 진짜 살아있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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