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의미 있고 가치가 있다면

다시 시작해 보자

by 꽁스땅스

대학 입학 후 나의 목표는 졸업 후 바로 사회인이 되는 것이었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더군다나 보통의 실력으로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했다. 위로 언니와 오빠의 적극적인 독려로 부모님은 비싼 등록금에 기숙사, 생활비까지 마련해 주셨다. 부모님은 섣불리 연고도 없는 서울에서 아르바이트할 생각은 하지 말고 공부에만 집중하라고 하셨다.


지도 교수님께서 첫 수업에 앞으로의 대학생활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취업을 위해서는 전공지식, 영어 구사능력, 컴퓨터 활용능력을 강조하셨다. 대학 내 다른 과들에 비해 지금껏 취업률이 가장 좋은 과라며 4년 동안 이 세 가지 능력을 기르는데 최선을 다하라고 하셨다. 수업 후 영어에 대한 생각을 곰곰이 하게 되었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처음 영어를 배울 때, 그 신기한 외국어를 참 좋아했다. 선생님을 잘 만난 건지 영어에 대한 흥미가 꿈틀꿈틀 거리며 매 수업 시간을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2학년 이후로는 문법 위주의 공부로 변하면서 본문을 통째로 암기하거나 문장을 분석하며 문법적인 오류를 찾기에 급급했다. 그냥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고3 때 남자 영어 선생님을 짝사랑하면서 반짝 영어에 대한 애정이 재생되긴 했지만 입시가 끝나고 나의 영어공부도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다.


교수님 강의 후 다시 영어공부를 시작하자니 뭐부터 해야 할지 엄두가 안 났다. 그래도 말하기로 다시 재미를 느껴야 한다는 생각에 영어학원을 등록했다. 레벨테스트를 받고 주중 매일 새벽 6시 반 수업을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꾸준히 다녔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건 학원에서 내준 과제다.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이태원에 가서 아무 외국인이라도 붙잡고 이야기해보라는 것이었다. 학원 친구들과 주말에 썰렁한 이태원 햄버거 가게에서 들어오는 외국인을 주시했다. 쭈뼛쭈뼛 다가가 영어를 배우는 학생이라 소개하고 몇마다 주고받으며 얼굴이 벌게지고 진땀을 뺐다. 다닌 만큼 실력은 확신할 수 없지만 영어에 대한 두려움은 탈피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다른 한 가지는 모든 단계를 수료하면 학원에서 졸업시험을 본 것이다. 세분의 외국인 선생님 앞에서 무작위 질문에 대해 시간 내에 영어로 답을 하는 것이었다. 100여 가지 예시 질문에 대해 나름의 답안지를 만들고 말하기 연습을 했다. 학원 전 과정을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


동경하던 외국계 회사에서 사회생활 시작했다. 첫 회사에서는 영어를 사용할 일이 거의 없었다. 단지 보고서 작성이나 전화 통화, 영어로 된 사내 서류에 적응하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두 번째 회사에서는 사내 메일부터 교육이나 회의를 위한 출장으로 영어환경에 노출 기회가 많았다. 그리고 세 번째 회사에서는 외국인 상사와 함께 일하면서 생존 영어를 해야만 했다. 매일매일이 전쟁이었던 것 같다. 한두 명의 외국인이 사내에 있는 것만으로도, 더군다나 매일 부딪히며 소통을 해야 하는 환경은 또 하나의 새로운 경험이자 도전이었다. 영어를 넘어서 불어 공부를 해보자는 동료의 제안으로 사내에는 어학 바람이 불기도 했다. 나 역시 그 시류에 잠시 올라타기도 했다.


회사를 나오고 보니 영어를 사용할 일이 없었다. 몸이 지치기도 해서 온라인으로라도 지속하려는 의지도 없었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이제 겨우 배우기 시작한 불어를 공부하겠다고 덜컥 학원을 등록했다. 그렇게 영어는 하루하루 잊혀 가고 걸음마 불어를 1년 정도 배웠다. 어학이라는 게 꾸준히 사용하지 않으면 잊히기 마련이다. 코로나로 학원을 쉬게 되면서 불어도, 그전부터 잊혔던 영어도 가물가물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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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에서 매일 읽고 쓰기를 하며 언제 가는 내 생각을 영어로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와서 굳이 왜냐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한때 내가 좋아했던 언어이고 그 언어로도 나를 표현하고, 번역서가 아닌 원문으로도 책을 읽어보고픈 욕심이 생겼다. 그게 언제가 되었든 간에. 나이가 들고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서도 책을 읽을 거니까 지금부터 차근차근 공부하다 보면 가능하지 않을까. 다른 사람의 시선이 뭐 그리 중요한가. 나에게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고 판단이 된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그리고 코로나가 종식되고 자유로이 여행을 갈 수 있게 된다면 함께 일했던 동료들을 만나 조금은 더 속 깊은 대화를 나누며 우정을 돈독히 하고 싶기도 하다.


지금 바로 여기에서 내 스스로 의미를 느낄 수 있는 활동으로 내 삶을 채우는 것이 옳다.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에 얽매이지 말자. 내 스스로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꼭 그만큼만 내 죽음도 의미를 가질 것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p90>


나의 이런 바람을 알았던 걸까. 이번 9기에 한 달 영어 쓰기라는 프로그램이 새로이 만들어졌다. 한 달 드로잉도 구미가 당겼지만 나의 우선순위는 영어 쓰기였다. 벌써 6일째 영어로 매일 글쓰기를 하고 있다. 한 달 서평처럼 공통 질문지를 통해 어떤 글을 쓸 건지 언제 어디서 쓸 건지 등 사전 계획부터 시작해서 자유 주제 혹은 주어지 주제에 대해 선택해서 쓰기 시작했다. 영어 글쓰기 책도 미리 사둔 게 있어서 하루에 규칙 하나씩 공부한다. (이제 겨우 두 번 했지만^^) 단어, 문장 구조, 글의 흐름 모두 다 엉망이다. 다른 동료분들의 글을 읽으며 다들 나름의 동기로 영어 쓰기를 하고 계셨다. 오래 써온 동료분들의 글은 모르는 단어가 보이지만 영어스럽다. 그러다 내 글을 마주하면 한없이 작아진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시작을 할 수 있어서 한 달이 참 감사하다. 이번 한 달, 읽고 쓰는 사람 그리고 영어 쓰기도 하는 사람이 되어보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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