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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꽁스땅스 Apr 10. 2021

새로운 길을 열어주길

어느 순간 기다림 모드로

아직은 깜깜한 새벽, 눈이 떠졌다. 마음이 불편해서인지 일찍 깬다. 두 주간 새벽에 나가는 남편이 안쓰러워 아침을 챙겨주던 게 습관이 된지도 모르겠다. 알람이 울리기 전 나는 남편과 결혼할 때 생각이 났다


양가 어른끼리 아는 이웃사이라는 사실에 나는 마음이 불편했다. 처음 남편을 봤을 때 결혼에 관심이 1도 없을 때여서인지 엄마의 부탁에 마지못해 나갔다. 남편의 첫인상은 마음속에 상상하던 배우자 상과 달랐다. 기억이 나는 건 내가 영혼 없는 대답을 하는데도 진지하게 질문을 이어가는 남자. 아무리 생각해도 이 사람이 아닌 것 같아 두 번이나 연락하지 말라고, 부모님께 잘 말씀드리라고 했지만 꾸역꾸역 집 앞으로 찾아왔던 사람. 만난 지 3개월쯤 되었을 때, 현이 전화로 대뜸 이런 말을 했다. 


" 우리 날이 잡혔대요. 부모님끼리 가을쯤 식을 올렸으면 하세요"


" 네? 이건 무슨 말이에요? 이것 보세요?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저 결혼 생각 없다고요. 부모님께 아직 말씀 안 드렸나요? 아니 초등학생도 아니고 부모님이 하라고 결혼하시게요? 똑똑이 말씀드리는데 저는 안 합니다. 아시겠어요?"


기가 막힌 나는 생각나는 대로 쏟아놓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씩씩거리며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


" 엄마, 날이 잡혔다는 말이 사실이야? 그 사람이 전화 왔어. 왜 내 의사와 상관없이 엄마 마음대로야? 적어도 당사자인 나한테 먼저 물어야 하는데 거 아니야? 난 결혼 안 한다고요!!."


" 진정해. 엄마가 보기에 그 집 우리랑 사는 것도 비슷하고 부모님도 자상하셔. 결혼하고 살아보면 엄마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거야. 그 집 아들도 그래. 맏이긴 해도 이모가 그러는데 품성이 착하다더라. 별 사람 없어. 언제고 할 결혼. 좋은 자리 있을 때 해"


" 아니 언제고 할 결혼이라니? 난 아직 생각도 없는데 엄마 얼굴 보고 나간 거야. 그리고 그 사람 자기 생각도 없는 사람이야. 부모님들이 하자는 대로 하하 거리며 따라가는 사람이라고. 날 잡았다고 남의 일 말하듯 하더라"


"아이고 그건 아니야. 이모 말로는 네가 맘에 들었대. 아들 말 듣고 그 집 부모님도 기분이 좋아서 평소 친분 있는 스님한테 날을 봐달라고 한 모양이야. 엄마가 생각하기에 너도 아무 말없어서 싫지는 않구나 했지. 너 바쁘다길래 미리 연락 못했어. 화내지 말어. 아무렴 부모가 좋다고 그럴 사람은 아니야"


" 아무튼 난 아니라고. 결혼 생각 없으니까. 엄마는 그리 알고 계셔. 더 이상 지 않게 이모님한테 말씀드리세요. 제발요!"


그날 이후 며칠간 그 사람도 엄마도 연락이 없었다. 이대로 정리가 되고 있나 보다 생각하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나의 일상도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나 혼자 생각이었다. 그쪽 어머님은 신실한 불교신자다. 천주교 신자인 친정 엄마와 소개한 이모님이 성당에서 혼배성사를 하자는 얘기가 오갔다고 한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양가 어머님 의견을 조율하느라 이모님이 꽤나 애를 쓰신 모양이다. 친정엄마는 남자 쪽을 배려해서 결혼식은 예식장에서 해야 하니 약혼식 겸 성당에서 관면 혼배 예식을 하려고 했다. 정작 당사자의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어른들끼리 서로의 입장만을 생각하느라 오해가 생겼던가 보다. 


한편 남편은 주말에 부모님이 계신 고향으로 내려가 이틀 동안 머무르며 부모님께 의사 표명을 했다. 자신은 내가 말한 대로 성당에서 세례를 받을 거고 결혼식을 양보해 줬으니 성당에서 하는 혼배성사를 할 거라고 말이다. 어떤 이야기가 자세히 오간지는 모르지만 그쪽 부모님은 오해를 풀었다. 그날 저녁 나의 마음에도 변화가  일었다. 


" 여보세요? 오랜만이에요."


나는 갑작스러운 전화에 눈이 똥그래진 채 아무 말 없이 듣기만 했다. 


" 그동안 연락을 못해서 미안해요. 저도 생각을 좀 하느라. 제가 많이 좋아합니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어요. 금요일 저녁에 퇴근하고 집에 내려왔습니다. 종교 문제는 부모님께 충분히 말씀드렸어요. 괜찮다면 저희 아버님이 통화하고 싶어 하세요. 잠시만요"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졌다. 생각할 틈도 없이 그쪽 아버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얘기인즉, 종교는 아무 문제가 아니라며 당사자들끼리 결정해야겠지만 자식이 좋다고 하고 우리 부모님과 인연을 맺고 싶은 마음에 성급하게 밀어붙였던 것이었단다. 좀 더 만나보며 시간을 가지라고 하셨다. 


그날 나는 남편에 대한 오해와 닫혔던 마음의 빗장이 스르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알람 소리에 일어났다. 남편은 벌써 일어나 거실 컴퓨터 앞에 앉아있다. 


" 일찍 일어났네"


"어. 잠이 안 오네. 더 자. 새벽마다 아침상 차리느라 피곤했을 텐데"


빵집으로 첫 출근하던 날 생각이 났다. 회사 다닐 때보다 더 환한 소년 같은 미소로 잘 다녀오겠다던. 예상치 않은 상황에 두 주 만에 그만두었으니 만회를 해야 했다. 힐끗 컴퓨터 화면을 보니 빵집 채용 공고가 즐비하다. 자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누가 뭐라고 해도 아닌 사람. 회사생활을 할 때도 그랬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서 손해를 보더라도 아닌 건 아닌 사람.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빵집은 수시로 채용되는 것 같아. 특히나 경력이 짧을수록 이직도 많은 것 같고.. 걱정 마, 내가 누구야. 일단 마음먹으면 하는 사람이라고. 자기한테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두 주 만에 그만둔 건 미안해. 어제 밤늦게 사장이 문자 왔더라. 알겠다고. 그게 끝이야. 그만두길 잘한 건 같아. "


" 뭐? 전화가 아니라 문자가 끝이야? 무슨 사람이 그래. 그만둔다면 얼굴은 못 보더라도 전화로 무슨 문제인지 확인해봐야 하는 거 아니야? 두 주간 일한 건 쳐주시기는 하는 거야? " 


" 기대할지 말자. 계약서도 안 썼어. 비싼 공부한 셈 치지 뭐. 일 공부, 사람 공부 헤헤" 


" 뭐라고? 아르바이트도 계약서 쓰는 판국에. 자기 진짜!!"

" 조만간 다시 일할 거니까 지켜봐 줘. 난 빵일이 좋아. 나에게 맞는 곳을 찾을 거야." 


가끔 현을 볼 때면 융통성이 없는 건지 모자란 건지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었다. 처음에는 뽀글뽀글 화가 나다가 어느 순간 기다림 모드로 전환했다. 스스로 터득하고 느끼고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인생의 큰 사건인 결혼이란 산을 넘어보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해가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나는 첫 빵집 경험의 오해가 결혼했을 때처럼 남편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길 마음속으로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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