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빵이야?
"현실감각이 없어서야" 나는 한마디를 뚝 던져놓고 주방으로 갔다.
" 아니 기술도 좋지만 어떤 사람한테 배우는가도 중요하지?" 남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거실에 앉아 있다.
설거지하는 나는 뽀글뽀글 화가 올라왔다. 갑자기 예전 생각이 났다. 이제는 회사 생활을 접을 때가 되었다며 심각한 얼굴로 나에게 말하던.
남편은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좋아하는 일을 찾아야겠다고 했다. 남들은 들어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기업에서 자기가 원하던 일이 아니라며 몇 개월간 나를 괴롭혔다. 나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남편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게 회사를 나오고 님편은 1 년 가까이 매일 출근하듯 나갔다. 퇴근할 때쯤 내가 근무하는 회사 앞으로 차를 가지고 데리러 오기도 했다.
" 오늘 어떻게 보냈어?"
" 도서관에서 책 보고 신문 읽고 운동했지. 얼마 만에 여유인지 모르겠어"
"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운동으로 체력관리 잘해"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빵을 배워야겠다며 제빵 학원에 등록했다. 필기시험에 붙더니 실기시험도 한 번에 합격했다. 운이 작용한 건지 잠재된 실력인지 모르지만 그 누구보다 나는 남편의 합격을 축하해 주었다.
" 왜 하필 빵이야"
" 내가 좋아하는 걸 생각해 봤거든. 책, 빵, 커피, 걷기.... 커피를 배워볼까도 했는데 내 손으로 뭔가 만들어내는 빵에 더 매력이 느껴지더라고! 밀가루 반죽을 만지는 감촉도 좋고 내 손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완성한다는 게 맘에 들어. 회사에서는 업무가 쪼개져 있잖아. 부서로도 팀원들 사이에서도 그렇지. 완성되기까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 물론 개인이 기여한 부분이 있지만 말이야, 제빵의 과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내 눈으로 확인이 가능하잖아. 예측도 되고."
" 그래. 그런 면은 있지. 그래도 한 부분만을 본다면 내가 맡은 분야를 더 깊이 있게 안다는 장점이 있잖아. 업무가 바뀌면 또 새로운 경험도 하고"
" 물론 그렇긴 하지만 Never ending story잖아. 회사는 계속 성장하며 나가야 하니까. 예측 불가한 일이 끊임없이 주어지는 게 싫더라고"
" 아니 무슨 할아버지 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 불확실한 미래, 불확실성이 있는 게 일상이지. 기업은 계속적으로 존재한다는 가정 아래에서 사업을 영위한다. Going Concern 계속기업의 정의 몰라? 빵집도 매일 굴러가잖아? "
" 그래도 하루하루 매듭을 지을 수 있잖아. 내일은 또 내일 빵을 만들면 되고"
" 회사일도 하루하루 스스로 매듭짓기 나름 아냐? 물론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에 대응해야 하는 변수가 있지만 회사원이라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또박또박 월급 받고 일하잖아.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실력을 꾸준히 키워야 하지만 말이야. 지금 우리 나이가 그럴 때 아닌가?"
"인생은 길어. 그 길이 아니다 싶으면 시행착오를 거치면서라도 도전을 해 보고 싶어. 빵도 그 도전 중 하나고"
" 아니 그럼 또 바뀔 수도 있다는 거야?"
" 아냐, 일단 빵에 내 열정을 쏟아붓겠다는 거지. 봐, 한 번에 자격증 합격하잖아. 나 대단하지 않아?"
" 그래 축하해. 그래서 이제 다음 계획은 뭐야?"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나와버렸다. 남편이 제대로 된 일을 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기분이 좋아서인지 남편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 어 이제 일자리 알아봐야지. 바닥부터 배워서 내 실력을 쌓아가는 것. 그게 그다음 스텝이야!"
" 굿 잡! 기대할게"
남편은 며칠을 컴퓨터 앞에 앉아 이력서를 만들고 자기소개서를 뚝딱거렸다. 그러더니 여기저기 지원을 하고 면접을 보러 다녔다. 주말 오후 나는 주 중의 피로로 잠시 눈을 붙였다. 거실에 있던 남편의 목소리에 눈이 떠졌다.
" 아 네 감사합니다.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궁금하던 차에 남편이 방으로 들어왔다.
"월요일부터 출근하래. 느낌이 좋아. 거기 사장님이 제빵 기능장이고 다양한 빵을 만들어 파는 곳이야 집에서도 가깝고"
" 우와 자기 대단하다. 드디어 제빵사로 첫 출근하는 거야? 축하축하"
" 제빵사라는 자격증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실무에서는 바닥부터 배우는 거지. 사장님 말로는 오븐에서 빵이 구워지면 제때 꺼내는 거랑 토핑을 위한 야채 준비가 주업무래. 막내니까 시키는 대로 해야지 뭐"
" 자기 원래 집에서도 야채 다듬기 선수잖아. 잘할 거야. 뜨거운 오븐이 문제다. 조심해"
그렇게 첫 출근 후 집으로 돌아오는 남편의 모습은 나날이 핼쑥해졌고 회사생활을 할 때 나왔던 배는 점점 줄어들었다. 집에 오면 말 수가 줄어들었고 저녁을 먹은 후에는 소파에서 금세 골아떨어졌다.
출근한 지 두 주가 되었을까. 남편이 소주를 사들고 왔다.
" 아니 내일 새벽에 출근할 사람이 웬 소주야?"
" 나 내일부터 출근 안 할 거야"
" 무슨 소리야?"
" 사장님이 자꾸 자존심 상하게 해. 일이 힘든 건 참겠는데 도저히 그런 말을 들으며 일할 수 없어. 기술도 좋지만 사람이 아니야"
" 아니 사회생활 한두 번 해봐. 사무실에서도 진상인 상사, 동료, 거래처 다 상대했으면서! 이미 안 가겠다고 얘기한 거야?"
" 저녁 먹고 문자 보내려고"
" 난 잘 모르겠어. 회사나 빵집이나 사회생활하면서 좋은 사람들하고만 일하나? 성격이 진상 같아도 배울 점이 있음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면 되지. 자기가 판단할 일이지만 난 자기가 이해되지 않아"
얼굴이 반쪽이 되고 힘들어하는 남편에게 화내는 나 자신이 싫어졌다. 저녁 식사 내내 침묵이 흘렀다. 남편은 산책하고 오겠다며 나갔다. 그리고 빵집에 그만두겠다는 문자를 날렸다. 대체 자기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기는 한 것일까?